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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서울의 봄, 재야는 나를 대통령 만들려고 했다”-김대중 육성 회고록〈1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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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김대중 육성 회고록 〈11〉

1979년 말, 박정희 대통령(이하 존칭 생략)의 18년 철권통치가 막을 내리면서 세상은 민주화가 다 된 듯 설익은 낙관론에 젖었다. “유신의 심장을 쐈다”는 김재규의 10·26 사건은 박정희의 서거와 함께 유신 시대에 종말을 고했으니 들뜬 만도 했다.

이즈음 ‘전두환’이란 낯선 인물이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보안사령관(소장) 전두환은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었다. 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그의 첫인상은 강렬했다. 그는 “주범 김재규가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혀 대통령이 되겠다는 어처구니없는 허욕이 빚은 내란 목적의 살인사건이며 군부의 개입은 없었다”고 규정했다. 그때만 해도 전두환이 신군부의 최고 실력자라는 사실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나, 김대중(DJ)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10·26의 전모가 밝혀지면서 국민들은 충격에서 벗어나고 사회 불안도 누그러들었다. 하지만 박정희의 빈 공간을 채울 주도적 세력이 없었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의 정부, 계엄사령관 정승화와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주축이 된 군부, 집권당 민주공화당과 야당 신민당의 정치권이 제각기 암중모색하던 혼돈의 시간이었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위태롭다”고 느꼈다.

“계엄 해제는 호랑이의 어금니 빼기”

1980년 4월 7일 ‘서울의 봄’ 시절 양일동 민주통일당 총재 장례식에 참석한 ‘3김’ 김대중, 김종필, 김영삼(왼쪽부터). [중앙포토]

1980년 4월 7일 ‘서울의 봄’ 시절 양일동 민주통일당 총재 장례식에 참석한 ‘3김’ 김대중, 김종필, 김영삼(왼쪽부터). [중앙포토]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됐다. 최규하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접선거로 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직후였다. 희대의 하극상이 벌어졌다. 전두환이 헌병대를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보내 총격전을 벌인 뒤 자신의 직속 상관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는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정승화에게는 김재규의 10·26 범행을 묵시적으로 동조했다는 내란 방조 혐의를 씌었다.

12·12는 전두환의 신(新)군부가 정승화의 구(舊)군부를 무력으로 제압하고 군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나는 전두환과 그를 지지하는 정치군인들의 야욕을 간파했다. “군사반란 세력이 순순히 물러나지 않겠구나” 하는 걱정이 엄습했다.

신군부를 견제하려면 계엄 해제가 급선무였다. 계엄령은 군부가 치안 유지 명분으로 민간인 권리를 제한한다. 이를 구실로 국정을 볼모로 잡고 있기 때문이다. 계엄령의 초법적 권력을 빼앗아야 한다고 봤다.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민주공화당 김종필 총재에게 호소했다. “저들의 무기가 된 계엄령을 해제하면 호랑이의 어금니를 빼 버리는 것”이라고 했지만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태풍을 품은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는데 화창한 봄날을 기다리는 오판에 정치권은 빠져 있었다. 신군부가 정국 주도권을 쥐게 된 12·12 사태의 숨은 의미를 안이하게 판단했다.

80년이 밝아오자  ‘정권 이양’ 등의 장밋빛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민주화의 여명’이란 표현이 언론을 장식했다. 김대중·김영삼·김종필을 일컫는 ‘3김’이 세인의 입에 오르내렸다.

신군부에 실권 빼앗긴 최규하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인 전두환 보안사령관(소장)이 1979년 11월 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전모를 발표하고 있다. [중앙포토]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인 전두환 보안사령관(소장)이 1979년 11월 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전모를 발표하고 있다. [중앙포토]

1월 말이었다. 나를 보자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전갈을 받았다. 서울 안국동 뒷골목에 있는 합동수사본부 안가로 갔다. 전두환은 나타나지 않았고, 보안사의 권정달 정보처장과 이학봉 대공처장이 나왔다. 그들은 종이 한 장을 내밀더니 위압적으로 말했다.

(권·이 처장) “‘해외에 나가지 않겠다’ ‘정치적으로 자중하겠다’ ‘정부에 협조하겠다’ 각서를 쓰고 서명해 달라. 그러면 사면·복권해 주겠다.”

(DJ) “나는 해외 갈 계획도 없고, 정치적으로 세상을 시끄럽게 할 생각도 없다. 이런 각서는 쓰지 않겠다. 복권되지 않아도 좋다. 그냥 돌아가겠다.”

보안사 군인들이 대통령의 고유 권한인 사면권을 들먹이는 상황은 정상이 아니었다. 최규하 대통령이 군부에 밀려 실권을 잃어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신민당 입당 불발에 야권 분열 비판

1979년 12·12 사태로 체포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이 군사재판을 받기 위해 호송되고 있다. [중앙포토]

1979년 12·12 사태로 체포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이 군사재판을 받기 위해 호송되고 있다. [중앙포토]

영문도 모른 채 나는 3월 사면·복권을 받고 공민권을 회복했다. 72년 10월 유신 이후 7년 반 만에 합법적으로 정치를 재개할 수 있게 됐다. 이른바 ‘서울의 봄’이 기지개를 켰다.

김영삼 총재와 신민당은 나의 조속한 입당을 원했다. 재야를 포함한 야권 통합과 대통령 후보 단일화를 위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신민당 복귀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훗날 나는 대통령이 되려는 욕심으로 DJ·YS 양대 세력이 분열했고, 결과적으로 신군부의 5·17 쿠데타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신민당 입당이 불발된 경위를 해명하겠다.

나는 신민당에 혼자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재야에서 투옥 등 생사고락을 같이하며 독재에 저항한 동지들과 함께 신민당에 들어가 민주화를 완성해 나가는 것이 순리였다. 이문영·박형규·문익환·이우정·계훈제·예춘호 등이 그런 분이었다. 그런데 박정희 독재 시절 침묵하던 사람들이 혹독한 시절을 헤쳐온 재야인사들에 대한 입당 심사를 한다는 신민당 방침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솔직히 당시 재야인사들 대다수는 내가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문동환·이문영·한완상·예춘호 등이 특히 적극적이었다. 나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중앙정보부까지 꿰찬 전두환

나와 YS가 사실상 갈라선 사이 전두환은 4월 계엄사 합수본부장 겸 보안사령관에 이어 중앙정보부장 서리까지 차고앉았다. 대한민국의 정보기관을 장악했다. 차곡차곡 진행되는 신군부의 음모를 정치권은 꿰뚫어 보지 못한 채 태평했다.

‘서울의 봄’을 맞은 대학에서는 매일 같이 규탄 집회가 이어졌다. 학원 민주화와 유신 체제에 협력했던 ‘어용 교수 퇴진’이 쟁점인 교내 시위였다. 그러던 5월 14일 서울 지역 27개 대학 총학생회는 “우리의 평화적 교내 시위는 이제 끝났다. 교문을 박차고 나와 싸울 것”이라고 결의하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계엄령 철폐” “이원집정제 개헌 음모 철회” “전두환 퇴진” 등 정치적 구호가 터져 나왔다. 철야농성, 파출소 습격 등 대학생 시위는 격해지고 지방으로 퍼졌다. 시위와 집회를 금지한 신군부의 비상계엄 체제를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다.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 대사가 집으로 나를 찾아왔다. “사태가 급박해지고 있다. 군부의 쿠데타는 절대 용납할 수 없으니 어떤 빌미도 줘서는 안 된다”고 미국 정부의 우려를 전하며 대학가와 재야를 진정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질서를 안 지키면 신군부에게 (물리력을 동원하는) 좋은 구실을 주고 당한다”는 내 생각과 일치했다.

“도대체 목이 몇 개나 됩니까?”

미국 대사를 만난 그날, 문익환 목사가 윤보선 전 대통령이 서명했다는 재야 단체의 성명서를 내보이며 서명을 요청했다. 내용이 과격했다.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모든 군인은 무기를 놓고 병영을 나와라. 모든 노동자들은 해머를 놓고 공장을 떠나라. 모든 상인들은 문을 닫고 철시하라. 모든 국민들은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달고 장충단공원으로 모여라.’

놀라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재야인사들은 대학생들의 시위와 시민들의 동조 열기에 한껏 고무돼 있었다. 나는 숨을 가다듬고 말했다.

“이 세상 다 살고 싶은가. 도대체 목이 몇 개나 되는가? 계엄령하에서 군인들 보고 총을 내려놓으라 하면 현장에서 즉결처분을 당해도 할 말이 없다. 지금 누구를 도와주려고 하는 것인가? 신군부가 원하는 것이 혼란이다. 이건(성명)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처박는 꼴이다.”

나는 성명 초안에 반대했다. ‘계엄령 즉시 해제’ ‘전두환 퇴진’으로 고치도록 설득한 끝에 수정된 성명이 발표됐다.

일장춘몽으로 끝난 ‘서울의 봄’

학생들의 자제를 당부하는 나의 호소는 먹혀들지 않았다. 서울 지역 대학생 10만여 명은 15일에도 서울역에서 계엄 철폐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가두시위를 이어갔다. 공수부대가 투입된다는 소문이 돌면서 유혈사태에 대한 긴장이 고조됐다. 이를 의식한 학생들은 시위를 잠정 중단하는 ‘서울역 회군’이라는 ‘철수’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당시 신군부는 ‘불순분자들의 책동에 의한 사회 혼란’이란 빌미를 찾고 있었다. 반정부 투쟁으로 과격화 양상을 보이던 대학가 시위는 호재였다.

신군부는 마침내 일을 저질렀다. 전두환은 청와대에서 한밤중에 치안 대책 회의를 열고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겠다고 최규하 대통령에게 ‘통보’했다. 17일 토요일 밤 모든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신군부는 완벽하게 권력을 탈취했다.

‘서울의 봄’은 일장춘몽의 허망한 봄으로 지고 있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은 왔건만 진짜 봄 같지는 않았다. 동교동 집에 군홧발 소리가 들렸다. 집 초인종이 울렸다.

※ 더중앙플러스에서 연재 중인 김대중 육성 회고록 전문(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69852)을 보실 수 있습니다.

12회 〈5·18과 내란음모 사형수의 운명〉이 이어집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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