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간첩 잡으려면 눈치 봐야 하는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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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승규 전 국가정보원장이 이임사에서 "가슴 뿌듯했던 것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간첩 수사 등 국가안보 책임기관의 사명을 다한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의 안보 위협 대처에서 뒤죽박죽되고 있는 이 나라의 기막힌 상황을 반영한 소회가 아닐 수 없다.

국가정보원은 북한의 대남 공작 차단을 존재 이유로 하고 있는 정부 조직이다. 이를 위해 수천 명의 직원이 한 해 수천억원의 세금을 사용하고 있다. 간첩 수사는 이런 조직이라면 응당 해야 할 기본 임무다. 그럼에도 그 수장(首長)이 너무나 당연한 임무를 추진할 수 있어서 '가슴 뿌듯했다'고 하니 국민의 억장이 무너진다. 나라의 안보 기능에 뭐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됐다는 점을 극명하게 드러낸 것이다.

우리의 대공 역량은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을 거치면서 사실상 형해화(形骸化)됐다. '안보'와 '교류 협력'을 구분하지 못하는 두 정권의 색맹 때문이었다. 북한 감싸기와 맹목적 지원에 눈이 멀어 대공 분야는 치지도외(置之度外)해 왔다. 그 결과 국정원 내부 역량도 쇠약해졌고, 우리 사회엔 '간첩 불감증'이 스며들게 된 것이다.

특히 '일심회 간첩사건'을 계기로 우리 사회가 북한의 치밀한 공작에 취약하다는 게 여지없이 드러났다. 재계에서 명성을 쌓은 '386 주범 격'이 정.관.사회단체에 포진한 이들 세대와 유대를 갖는 게 얼마나 손쉬운 일이라는 것이 입증됐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주범의 포섭 리스트에 일심회 조직원들의 변호사가 포함됐다는 검찰의 주장은 매우 주목을 끈다. 제3국인을 위장해 침투하는 등 북한의 공작 양상이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지금 국정원이 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는 국내의 친북세력 속에 북한의 공작이 얼마나 먹혀가고 있는지를 파악해 내는 것이다. 공안 당국은 이 측면을 유념해 수사에 어떤 성역을 둬선 안 된다. 일심회 조직원들이 누구를 포섭하려 했고 이들은 어떻게 대응했는지, 국가 기밀을 제공한 사람은 누구인지 철저히 파헤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