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메이저 리그 출신도, 과학자도 뛰어든 임무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49호 22면

원자 스파이

원자 스파이

원자 스파이
샘 킨 지음
이충호 옮김
해나무

미국 메이저 리그 선수였던 모 버그는 흥미로운 인물이다. 우크라니아 출신의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프린스턴 대학을 나온 그는 야구 성적보다 다른 면모로 충분히 화제가 될만했다. 라틴어를 비롯해 여러 언어에 능통했을 뿐 아니라, 라디오 퀴즈 프로그램에 출연해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드러내기도 했다.

가장 이채로운 이력은 1940년대 초 메이저 리그에서 코치로 일하다 OSS(전략정보원), 즉 미국 정보기관 CIA의 전신인 조직에 합류한 점. 쉽게 말해 스파이가 되어 유럽의 과학자들과 접촉하거나 심지어 암살을 준비하기도 했다. 핵심적 과학자를 제거해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을 막기 위해서였다.

루 게릭, 베이브 루스 등 미국 올스타 야구 팀의 1934년 일본 방문 모습. 머리 위 화살표가 가리키는 사람이 모 버그. [사진 해나무]

루 게릭, 베이브 루스 등 미국 올스타 야구 팀의 1934년 일본 방문 모습. 머리 위 화살표가 가리키는 사람이 모 버그. [사진 해나무]

미국의 논픽션 작가가 쓴 이 책은 그를 비롯한 여러 인물에 초점을 맞추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원자폭탄 개발을 막기 위한 여러 활동을 그린다. 미국이 ‘맨해튼 프로젝트’를 추진했다면, 나치 독일이 자국의 화학자·물리학자들을 소집한 모임은 ‘우라늄 클럽’으로 불렸다. 일찌감치 30대 초반에 노벨상을 받은 이론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비슷한 연구를 진행한 퀴리 가문을 앞질러 1938년 핵분열 연구 논문을 가장 먼저 발표한 화학자 오토 한 등이 포함됐다.

이들이 원자폭탄을 개발할 가능성은 큰 위협으로 여겨졌다. 독일의 중수 확보를 막기 위한 작전을 필사적으로 벌인 것도 이를 짐작하게 한다. 노르웨이 발전소의 중수 생산 시설을 파괴하기 위해 영국과 노르웨이가 연합해 펼친 첫 번째 작전은 참담한 희생과 함께 실패로 돌아갔지만, 노르웨이는 정예 군인들을 투입해 두 번째 작전을 펼친다.

물리학·영문학을 전공한 저자는 원자폭탄 관련 연구 내용과 의미 등도 짚어가는데, 책 전체로 보면 과학사보다 군사작전과 첩보전에 무게가 실린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등장인물들의 면면. 퀴리 부부의 딸인 이렌과 그 남편 프레데리크 졸리오 같은 과학자들도 그렇다. 이 부부는 결혼 이후 ‘졸리오-퀴리’라는 성을 쓰면서 노벨상도 함께 받았는데, 나치의 점령 이후 프랑스를 떠나지 않았다. 프레데리크는 연구실에 있던 사이클로트론(입자가속기)이 독일 측에 넘어가면서 한때 부역자로 소문이 나기도 했지만, 실은 직접 화염병까지 만들며 레지스탕스 활동을 펼쳤다고 한다.

저자는 영웅이나 위인전의 주인공처럼 인물을 묘사하는 대신 각자의 약점이라고도 할 만한 부분을 포함해 대중의 눈높이에서 재미있는 일화나 면면을 그려낸다. 흥미로운 접근이되, 특정한 면모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들 때도 있다. 이 책에 따르면, 덴마크 물리학자 닐스 보어는 고국을 비밀리에 탈출하는 과정에서도 주변에서 감당하기 쉽지 않은 수다쟁이였다. 물론 그의 수다가 단지 일화에만 그치는 건 아니다. 그가 미국 측에 전달한 정보는, 비록 하이젠베르크와의 몇 년 전 만남에서 얻는 것이라고 해도, 독일의 연구 속도에 대한 두려움을 증폭시켰다. 이는 군인에 과학자들까지 참여해 첩보 수집 등의 활동을 하는 특수 부대, 이름하여 ‘알소스’ 부대가 만들어진 계기이기도 하다.

이 책이 가장 인상적으로 그려내는 과학자는 물리학자 새뮤얼 가우드스밋이다. 네덜란드 출신으로 미국에서 대학교수로 일하고 있던 그는 나치의 점령 이후 고국의 부모와는 소식이 끊어졌고, 가까운 사이였던 하이젠베르크와는 공적인 관계에서부터 적대적 상황에 놓이게 된다. 알소스에서 그는 스파이로 활동한 과학계 인사를 탈출시키거나, 연합군에 붙잡힌 과학자들을 심문하고 나치의 관련 정보를 분석하는 등의 일을 했다.

하지만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는 사전에 알지 못했다. 책에 따르면, 그는 몇 달 전 독일의 원자폭탄 계획이 한참 뒤처져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그러니 미국이 원자폭탄을 쓸 일도 없으리라고 낙관했다. 저자는 이렇게 썼다. “원자폭탄은 두려움에서 시작되었다. 즉, 핵무기를 보유한 독일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방어무기로 개발되었다. 하지만 독일의 위협이 사라지자, 단순히 방어 무기로 사용한다는 개념도 사라졌다.”

책에는 비밀 편지를 마이크로필름으로 전달하거나, BBC 뉴스 앵커 멘트에 작전 개시 암호를 넣는 등 당시의 첩보전과 관련해서도 흥미로운 면면이 드러난다. 포로로 붙잡은 독일 장군들의 대화를 도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독일의 연구 수준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다. 책에는 관련 동향을 전혀 엉뚱하게 판단했던 사례도 나온다. 독일이 원자폭탄을 만들지 못한 이유는 견해가 분분하다.  이 책에도 나오는 대로 사랑에 빠진 어느 과학자가 실험에서 실수를 한 게 영향을 미쳤는지, 과연 나치가 어느 정도 자원을 쏟아부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흥미롭게 읽히는 책인데, 전문 역사가의 책처럼 본문 내용에 대해 세세하고 구체적으로 출처를 밝혀 놓지는 않은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을 듯싶다. 사족으로, 모 버그는 종전 이후의 행적도 예사롭지 않았다. 미국 정부가 민간인에게 주는 최고 훈장은 마다하고 권총과 청산가리 캡슐을 기념품으로 챙겼다고 한다. 원제 The Bastard Brigade.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