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란과함께읽는명사들의시조] 황진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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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시조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가 황진이다. 말할 만한 사람들은 황진이를 우리 시문학사 최고의 시인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영국인들은 인도를 다 주어도 셰익스피어와는 바꾸지 않겠다고 했지만, 금아 피천득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수천 편을 가져와도 진이의 이 시조 한 편에 견줄 수 없다고 했다. 가람 이병기도 우리 고전을 송두리째 빼앗길망정 황진이의 이 시조 한 수와 바꾸지 않는다 했던가.

황진이의 시조 여섯 수 가운데 '동짓달~'은 스물일곱 살에 만난 당대의 명창 이사종을 그리며 쓴 시조다. '어우야담'에는 진이의 집에서 3년, 이사종의 집에서 3년을 살기로 약조하고 6년간의 애정생활 뒤에 깨끗이 돌아섰다는 기록이 있다. 현대판 계약결혼이다.

일찍이 풍악산.태백산.지리산 등을 유람했던 진이가 한번은 사또의 잔치 마당에 불려가 벼슬아치와 기생들이 가득한 마당에서 거문고를 타게 됐다. 해진 옷을 입고 얼굴도 씻지 않은 채 이를 잡으며 태연자약 거문고를 타는 진이를 보고 모여든 기생들은 기가 죽었다.

이렇듯 기개 우뚝한가 하면 옷깃 여미고 하늘하늘 노래하는 섬세한 여심이 '동짓달~' 같은 시조를 낳았다. 홀로 지새는 겨울밤은 얼마나 길고 긴가. 그 긴 시간 한 허리를 툭, 베어내서 봄바람 따뜻한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사랑하는 님이 어쩌다 오시면 굽이굽이 펴겠다고 절절히 노래했다.

'숭양기구전'에 따르면, 진이가 기적(妓籍)에 오르기 전에 떠꺼머리 홍윤보가 진이를 짝사랑하다 그만 상사병에 죽고 만다. 상여가 진이의 집 앞에 이르자 말이 슬피 울며 가지 않았다. 속적삼과 꽃신을 얹어주니 상여가 움직였다. 이처럼 아픈 사연이 있었기에 진이는 다음의 시조처럼, 보내고 그리워하는 마음은 나도 모르겠다고 노래했는지 모른다. '어져 내 일이여 그릴 줄을 모르더냐/이시랴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야/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느냐 누웠느냐/홍안(紅顔)을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느냐/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 하노라.' 백호 임제(1549~1587)의 시조다. 그는 서도병마사로 부임하는 길에 진이의 무덤을 찾아가 이 시조를 짓고 제사를 지냈다가, 임지에 이르기도 전에 파직당했다. 호방한 이 풍류랑의 얘기도 곡진한 심회를 살뜰히 담을 수 있었던 시조 3장에서 비롯한다.

요즘 황진이가 장안의 화제다. 소설도 나오고 영화도 만들고 지금은 TV드라마로 방영 중이다. 이 모든 일이 진이가 낳은 시조에서 비롯된다. 김종서(1390~1452)가 구국의 명장으로 기억되는 건 웅혼한 기상이 넘치는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가 있기에, 이순신(1545~98)이 넬슨 제독보다 훌륭한 함장으로 기억되는 건 진중(陣中)의 고뇌를 담은 '한산섬 달 밝은 밤에'라는 시조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황진이가 우리 가슴에 영원하듯이 시조는 영원하리라. 그나저나 먼 훗날 내 무덤가에 와 울어줄 임제 같은 한량 하나 생기게, 깊고 먼 시조 한 수 남기고 싶다.

홍성란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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