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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석재의천문학이야기

풀뿌리 우주문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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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과학기술계의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당분간 다른 나라들이 달이나 화성을 탐사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신세를 면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가 우주 탐사에 참여할 수 있느냐 마느냐는 어떻게 보면 덜 중요한 문제다. 더 중요한 것은 국민의 수준이 우주시대에 어울리는 우주문화를 갖느냐 못 갖느냐 하는 문제다.

우리나라 정보기관 어느 건물 지하실에는 ET 시체가 냉동보관되고 있다, 우리 공군 전투기 편대가 미확인비행물체(UFO)를 추적했다, 우리 국가정보원 정보관이 ET와 교전 끝에 전사했다, 우리가 만든 로켓이 드디어 달에 도착했다…. 우리도 이런 내용의 TV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동해에 소행성이나 혜성이 떨어지는 영화를 만들면 자연스럽게 'East Sea'도 홍보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제까지 우리는 불륜 드라마나 폭력영화만 보면서 살 것인가.

필자는 우리나라의, 우리나라 주인공에 의한,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한 신토불이 SF들이 먼저 자리 잡아야 한다고 믿는다. 처음부터 어마어마한 제작비를 들여 먼 은하계에서 레이저 검을 휘두르는 국적 없는 작품을 만들어 봐야 외국 작품의 각색물이나 아류로 느껴질 뿐이기 때문이다. 최근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라는 영화가 관객몰이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년에는 예컨대 우리 국가정보원 정보관이 ET를 추적하는 영화가 한 편 나왔으면 좋겠다.

대중적 우주문화란 대학가요제에서 카운트다운으로 시작되는 노래가 나올 수 있는 문화, '은하의 탄생' 같은 곡목을 갖는 음악이 나올 수 있는 문화, '환상의 블랙홀 IV' 같은 제목을 가진 추상화가 갤러리에 걸리는 문화, 불그죽죽한 칵테일을 '화성에서의 첫날밤'이라고 이름 지을 수 있는 문화…, 바로 이런 것이다.

최근 풀뿌리 우주문화들이 여기저기 싹트고 있어 전망을 밝게 하고 있다. '하늘의 연못'인 백두산 천지에 가서 남들은 모두 산만 촬영하고 있을 때 천지에서 은하수가 용솟음쳐 나오는 것 같은 광경을 카메라에 담은 문화일보 기자 김선규, 개그맨으로서는 최초로 재미있는 과학연극 '매지컬'을 만들어 순회공연하고 있는 '별 홍보대사' 이승환, 여성방송인으로서 최초로 우주 관련 서적 '스페이스 뉴스'를 곧 세상에 내놓을 KBS 아나운서 태의경…, 이런 사람들의 보석 같은 아이디어들이 파릇파릇 자라고 있는 것이다.

이런 풀뿌리는 군에서도 찾을 수 있다. 올 여름 대전의 국립중앙과학관과 꿈돌이랜드에서 열린 '견우직녀 과학축제'에 처음으로 공군이 참여했다. 공군은 앞으로 별 축제에 적극 참가해 국민에게 우주를 보여주는 데 최선을 다할 예정이란다. 이것이야말로 '하늘로! 우주로!'를 외치는 공군에 썩 잘 어울리는 모습이 아닌가. 아마 내년부터는 우주비행사복과 전투기 조종사복이 같이 뛰어다니는 우주축제를 구경할 수 있을 것이다.

원광연 교수가 이끄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 문화기술대학원은 11월 30일부터 4일간 코엑스에서 열리는 '과학과 예술의 만남' 행사 중 우주부문을 공들여 준비하고 있다. 이번 행사가 우리 우주문화의 현주소를 파악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라 생각돼 적극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