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300억 아끼려다 1조 토해냈다…국제정치 모른 기업의 죄값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글로벌 비즈니스와 지정학 변수

World View

골목에서 장사 잘하고 있는데 동네 깡패가 어슬렁댑니다. 신고해 봐야 일만 커질 듯해 ‘자릿세’ 좀 찔러주고 합의를 봅니다. 그랬다가 나중에 사회악과 거래한 조폭 일당으로 몰린다면 어떨까요? 글로벌 비즈니스 세계에도 비슷한 일이 있습니다. 시리아에 진출했다가 IS에 뒷돈을 준 프랑스 기업의 사례입니다.

기업이 치러야 할 ‘악마와의 거래’ 대가는 얼마나 될까. 2013년 시리아 동부와 이라크 북부를 파죽지세로 장악한 이슬람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와 프랑스 시멘트 기업 라파지(Lafarge) 이야기다.

2010년 시리아에 세운 공장이 잘 돌아가던 라파지로선 초조했다. IS를 피해 철수하면 투자금 2500만 달러(약 324억원)를 고스란히 날릴 판국이었다. 고민 끝에 라파지는 IS에 약 700만 달러(약 90억원)의 ‘뒷돈’을 건네는 선택을 했다. 이는 10년 후 100배가 넘는 대가로 돌아왔다. 미국 뉴욕 브루클린 연방법원은 지난해 10월 라파지에 테러자금 지원 등 혐의로 7억7800만 달러(약 1조71억원)의 벌금을 물렸다.

글로벌 비즈니스가 지정학에 휘둘리는 건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라파지처럼 한순간 어둠의 선택 때문에 회사가 휘청거린 경우다. 둘째, ‘정의로운’ 선택에도 대가는 따른다. 스웨덴 패션 기업 H&M은 2020년 중국 정부의 신장위구르 인권 탄압을 비판하며 신장에서 생산된 면화를 쓰지 않겠다고 발표한 뒤 불매운동으로 한때 500여 개였던 중국 매장 수가 360여 곳(2022년)으로 줄었다. 스포츠기업 나이키·아디다스 등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셋째는 기업의 선택과 무관하게 지정학적 갈등에 노출된 경우다. 2016년 중국이 한국 정부의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에 대해 롯데마트 영업정지로 보복해 롯데마트가 중국에서 철수한 게 대표적이다.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이에 대해 하버드케네디스쿨 선임연구원인 커밀라 캐번디시는 파이낸셜타임스(FT) 칼럼을 통해 “글로벌 기업은 ‘최고정치전문가(Chief Political Officer·CPO)’를 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고재무책임자(CFO)·최고기술책임자(CTO)처럼 핵심 사업에서 국제 정세 및 지정학 리스크를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는 경영자급 전문가를 따로 둬야 한다는 뜻이다.

글로벌 비즈니스에선 이미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강제 합병할 때부터 ‘지정학의 귀환’을 경고하는 주장들이 나왔다. “세계 정세는 점점 불안정해지는데 세계 경찰 노릇을 하던 미국의 개입은 줄어들고 있다”(존 칩먼 국제전략연구소·IISS 소장, 2016년 하버드비즈니스리뷰)는 게 대표적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2018년 1월부터 대중 관세를 매기며 중국과 무역전쟁을 시작하면서 불안감은 점차 현실이 됐다. 그러다 지난해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며 이제 지정학은 기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키워드가 됐다. 이후 러시아에서 운영을 중단하거나 철수한 기업은 맥도날드(식품)·자라(의류)·이케아(가구) 등 1100여 곳에 달한다. “경제 침체보다 훨씬 더 걱정되는 게 지정학”(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CEO)이란 얘기까지 나올 정도다.

미·중 패권 경쟁은 단연 지정학 스트레스의 끝판왕이다. “세계가 미국 주도 블록과 중국 중심 블록으로 나뉘어 기업이 중립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 됐다.”(포린폴리시)

지난 1월 영국 회계법인 언스트앤드영(EY)이 실시한 글로벌 CEO 1200명 조사에 따르면 3분의 1이 지정학적 불안정으로 인해 공급망을 조정하고 특정 시장에서 철수하는 등 해외 투자 계획을 재수립하거나 중단했다고 응답했다. 또 78%는 자국과 지정학적·경제적으로 가까운 국가에서만 인수합병을 고려할 것이라고 답했다. 글로벌 기업에서 이런 지정학 리스크 전담 부서를 이끌 수장이 바로 최고정치책임자(CPO)다.

삼성전자와 LG·한화그룹이 각각 마크 리퍼트 전 주한 미국대사, 조 헤이긴 전 백악관 부비서실장(트럼프 정부), 대니 오브라이언 폭스코퍼레이션 수석부사장(조 바이든 대통령의 상원의원 시절 비서실장)을 각각 영입한 것도 미·중 경쟁 확산에 대비한다는 의미도 담겼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