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콘더」 총리(분수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그 거대한 체구와 어눌한 말솜씨,그리고 세련되지 못한 몸짓에다 외국어를 한마디도 못 한다고 하여 국민들에게 곧잘 웃음거리가 되었던 헬무트 콜 총리가 드디어 통일독일의 재상이 되었다.
그를 웃음거리로 만들었던 유머 한 토막­.
어느 땐가 콜 총리가 레이건 미국 대통령,대처 영국 총리와 함께 NATO의 군사훈련을 참관한 일이 있었다. 그들을 태운 비행기가 고도 4천m 상공에 이르렀을 때 세 사람은 낙하산으로 뛰어내리기로 되어 있었다.
콜 총리가 제일 먼저 뛰어내렸다. 다행히 낙하산이 활짝 펴져 콜 총리는 무사히 내려오고 있었다.
두 번째로 레이건 대통령이 뛰어내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낙하산이 펴지지 않아 레이건 대통령은 곤두박질하기 시작했다.
세 번째 대처 총리의 낙하산도 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낙하산을 타고 천천히 내려오는 콜 총리보다 지상에 먼저 떨어질 참이었다.
이때 콜 총리는 갑자기 자신의 낙하산을 벗어버리면서 말했다. 『아,하마터면 뛰어내리기 시합에서 질 뻔했군.』
콜 총리는 이런 농담을 듣고도 허허 웃어 넘겼다.
그래서 사람들은 『콜이 자신에 대한 야유와 혹평에 일일이 신경을 썼더라면 일찌감치 들것에 실려 정치무대에서 사라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1m93㎝의 키와 1백5㎏의 몸집에 걸맞은 그 아량과 포용력이 있었기에 그는 독일통일이라는 거대한 드라마를 연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콜은 단순한 무골호인만은 아니다. 그는 기회를 포착하면 그것을 끝까지 물고늘어지는 끈질김과 함께 현실정치에도 뛰어난 감각을 지녔다.
그래서 흔히 콜의 정치적 수완을 「아나콘더의 사냥법」으로 비유하곤 한다. 아나콘더는 몸집이 크지만 독이 없는 뱀으로 목표물을 발견하면 그 퇴로를 차단하고 기진할 때까지 꼼짝않고 기다린다.
그러나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면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죄어든다는 것이다.
독일통일의 과정이 바로 그렇다. 그는 동독에 대해 처음에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다가 일단 베를린장벽이 무너지자 이제는 기회가 되었다고 판단,신중을 기하라는 주위의 충고에도 아랑곳없이 그대로 밀어붙인 것이다.
촌스럽고 멍청하고 영어도 한 마디 못 한다고 야유를 받던 그가 일약 세계정치무대의 거인이 된 것은 그러나 국민에게 신뢰를 주는 수미일관한 언행과 성실한 자세 때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