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진(61) 전 태광그룹 회장이 옥중에서 누나 이재훈 씨(67)를 상대로 400억 원을 달라는 소송을 내 출소 1년 8개월 만에 승소 판결을 받았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7부(부장 손승온)는 “누나 재훈씨는 이 전 회장에게 400억원과 지연손해금(연체이자)을 지급하라”고 지난 16일 판결했다. 인지대(법원에 내야 하는 수수료)만 1억2000만원이 넘고, 재훈씨가 400억원을 이달 안에 다 지급한다 해도 연체이자로만 약 270억원을 더 줘야 한다.
검찰 수사가 쏘아올린 상속 싸움…27년 전 유언장 꺼내
400억 원은 이 전 회장이 2010년 말 재훈씨에게 ‘맡긴 것’이라 주장하는 채권의 액면 금액이다. 당시 검찰은 태광그룹 비자금 수사를 시작했다. 문제의 채권은 두 사람의 아버지이자 태광그룹 창업주인 고(故) 이임용 선대회장이 차명으로 갖고 있던 채권이었다. 두 사람은 이번 재판 과정에서 서로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채권을 받았다고 다퉜다.
이임용 선대회장은 27년 전 ‘딸들 빼고 아내와 아들들에게만 재산을 주되, 나머지 재산이 있으면 유언집행자인 이기화 사장(이호진 전 회장의 외삼촌, 2019년 작고) 뜻에 따라 처리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1996년 선대회장 사망 당시 드러나지 않았던 ‘나머지 재산’은 10여년 뒤 드러났다. 검찰의 비자금 수사 등으로 상속세 신고에서 누락된 차명 채권·주식 등이 발견됐는데, 이 전 회장이 단독으로 처분했거나 자신의 명의로 실명 전환한 것들이었다.
검찰 수사 후 7년간 이어진 재판 끝에 이 전 회장은 2019년 6월 횡령 혐의 등으로 징역 3년이 확정됐다. 누나를 상대로 한 이번 소송은 그가 복역 중이던 2020년 3월 낸 것이다. 재판은 1년 반 동안 기일변경을 거듭하며 세 번밖에 열리지 않았는데, 2021년 10월 이 전 회장의 만기 출소 후 속도가 붙었다.
이 전 회장은 유언에 따라 채권을 단독 상속했다는 입장이다. 그는 “남매들 간 분란이나 경영권 분쟁 방지를 위해 표면적으로 내가 물려받는 재산이 다른 형제와 엇비슷해 보이도록 조정할 필요가 있었다”며 “아버지의 재산 중 드러난 재산은 형(이식진 전 부회장, 2004년 작고)과 반분하되, 차명 재산은 ‘나머지 재산’이란 형태로 외삼촌으로 하여금 나에게 집중시키도록 한 것”이라 주장했다. 반면 누나 재훈씨는 “그 유언은 무효이며, 채권은 동생이 맡긴 게 아니라 내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이라 주장했다.
유언 무효지만, 10년 버텨 "채권 소유권 인정"
3년 넘는 심리 끝에 법원은 “유언은 무효지만, 채권은 이 전 회장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재판부는 “유언 내용의 결정을 유언집행자에게 아무런 제한 없이 위임하는 것은 유언의 일신전속성(一身專屬性·특정인에 귀속되고 남에게 양도할 수 없는 권리)에 반하므로 ‘나머지 재산’ 유언 부분은 무효”라고 밝혔다. 따라서 “이 전 회장이 상속 개시(선대회장 사망) 당시 상속 채권을 단독으로 상속받을 권리는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상속 개시 이후 이 전 회장이 채권을 실질적으로 점유·관리해 왔고, 다른 상속인들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기간인 10년이 이미 지났다는 점을 들어 “유언의 효력 유무와 무관하게 이 전 회장이 채권에 대한 단독 상속인으로서 온전한 소유권을 취득했다”고 봤다. 아버지 생전에 채권을 증여받은 거란 재훈씨의 주장에 대해선 “인정할 근거가 없다”고 했다.
이 선대회장이 사망한 지 27년이 흘렀지만, 상속재산을 둘러싼 남매간 법정 다툼은 계속되고 있다. 이 판결은 확정되지 않았으며 어느 쪽이든 2주 안에 항소장을 제출하면 항소심 재판이 시작된다.
재훈씨는 검찰 수사 후 아버지의 차명 상속재산을 알게 된 2012년에 이 전 회장을 상대로 “상속권을 침해당했으니 차명 주식 등을 내게 달라”며 240억원대 소송을 낸 적이 있다. 그때도 상속 이의제기 기간이 지났다고 1심에서 패소했는데, 이 판결이 대법원에서 확정될 때까지 7년 동안 다퉜다. 당시 재훈씨 외에도 또 다른 누나, 이복 형, 조카 등도 이 전 회장을 상대로 소송을 냈지만 모두 이 전 회장의 승리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