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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뻐하던 '사냥개'에 물릴 뻔…짖어도 단속 안 한 푸틴의 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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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푸틴의 사냥개’로 불리던 바그너그룹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의 반란으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리더십이 타격을 입었다. 24시간 만에 무장 반란은 해제됐지만, 23년간 쌓아온 푸틴 대통령의 철권통치가 흔들릴 가능성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푸틴의 강권에 숨죽여 지내던 러시아 엘리트 집단 내에서 불만이 분출할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이끄는 민간군사기업(PMC) 바그너그룹이 반란을 일으키고 모스크바 방면으로 진격하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4일 대국민 TV 연설에 나섰다. 신화통신=연합뉴스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이끄는 민간군사기업(PMC) 바그너그룹이 반란을 일으키고 모스크바 방면으로 진격하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4일 대국민 TV 연설에 나섰다. 신화통신=연합뉴스

위성락 전 주러시아 대사는 25일 중앙일보에 “우크라이나와 중요한 전쟁 중인 상황에서 러시아 내부 반란으로 이런 사태가 벌어진 건 푸틴 대통령과 체제에 리스크를 드러낸 것”이라며 “반란군의 후퇴로 일단 큰 위기는 모면했지만, 이번 내분의 여파가 상당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와 관련, 24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는 모스크바발 분석 기사에서 “1999년 12월 31일 푸틴이 대통령 권한대행에 임명된 이후 이처럼 극적인 도전에 직면한 적이 없었다”며 “이번 사태는 푸틴이 23년간 러시아를 통치하면서 구축한 비공식 권력구조(informal power structure)의 놀라운 결과”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푸틴 대통령은 신뢰할 수 있는 측근에게 주요 업무를 맡기고, 자신을 약화시킬 수 있는 라이벌 파벌의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 ‘분열과 정복’ 방식으로 통치했다”고 설명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도로 주변에 '승리하는 팀에 합류하라'는 문구가 적힌 바그너그룹의 용병 모집 옥외 광고판이 설치돼 있다. EPA=연합뉴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도로 주변에 '승리하는 팀에 합류하라'는 문구가 적힌 바그너그룹의 용병 모집 옥외 광고판이 설치돼 있다. EPA=연합뉴스

푸틴은 특히 정권 수호를 위해 연방수사위원회, 검찰총장, 연방보안국(FSB) 등 공안기관을 여러 곳으로 나누고 업무를 중첩시켰다. 한마디로 “누가 언제 체포할지 모르게” 라이벌 기관들이 긴장하고 서로 경쟁하게 부추겨 오로지 자신에게만 충성하도록 시스템을 만든 셈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푸틴 대통령이 측근들을 과도하게 챙기는 비정상적인 인사 관행이 잦았다는 점이다. 유년 시절의 유도 스파링 파트너, 옛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시절 동료 등은 억만장자가 되거나 권력의 중심부로 다가갔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던 범죄자 출신 요리사 프리고진도 크렘린궁의 연회 음식을 맡으면서 푸틴의 신뢰를 샀다. 그 결과 러시아군에 반기를 들 수준의 민간군사기업(PMC)인 바그너그룹을 만들어 승승장구했다.

'푸틴의 요리사'였던 예브게니 프리고진은 바그너그룹을 세우면서 '푸틴의 사냥개'라는 별칭을 얻게 됐다. 사진은 2011년 11월 11일 러시아 모스크바 외곽 레스토랑에서 프리고진이 블라디미르 푸틴 당시 러시아 총리에게 음식을 서빙하는 모습. AP=연합뉴스

'푸틴의 요리사'였던 예브게니 프리고진은 바그너그룹을 세우면서 '푸틴의 사냥개'라는 별칭을 얻게 됐다. 사진은 2011년 11월 11일 러시아 모스크바 외곽 레스토랑에서 프리고진이 블라디미르 푸틴 당시 러시아 총리에게 음식을 서빙하는 모습. AP=연합뉴스

이번 반란이 있기 전까진, 푸틴은 프리고진이 러시아 국방부를 비난하며 험한 말을 내뱉어도 대놓고 단속하지 않았다. 반란이 닥치고서야 5분간 TV 연설을 통해 프리고진을 ‘반역자’로 내쳤다.

프리고진을 사실상 방치했던 푸틴 대통령의 태도를 두고 전문가 사이에선 “쿠데타 가능성이 있는 ‘스타 장군’의 출현 등 군부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이었다”는 풀이가 나온다. 안드레이 솔다토프 유럽정책분석센터(CEPA) 선임연구원은 “가장 비참한 전쟁(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매우 인기 있는 장군이 나오기 때문에 (푸틴은 이들을 정치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매우 약하고 타협적인 사람(프리고진)이 필요했다”고 NYT에 말했다.

"푸틴의 엘리트 통제력 약화"

이번 사태로 푸틴식 통치 방식의 심각한 문제점이 노출되면서 러시아 엘리트 집단에 대한 푸틴의 통제력이 약해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장세호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연구위원은 “즉각적이진 않지만 잠재적인 위협 요인이 커졌다”며 “전쟁이란 특수한 상황에서 금기시되던 문제들이 이번 사태로 표면화됐다”고 말했다. 이어 “만일 전황이 불리해지면 엘리트 집단 내부에 잠재해있던 불만이 분출할 가능성이 있다”고 예상했다.

그렇다고 당장 80%가 넘는 푸틴에 대한 러시아 국민의 지지가 식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위 전 대사는 “(높은 지지율은) 러시아의 특수한 정치 현실을 고려해 해석할 필요가 있으나, 이번 사태가 큰 충돌 없이 해결됐기 때문에 푸틴 대통령의 지지율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바그너그룹이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를 향해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 가운데 24일(현지시간) 모스크바 붉은광장 근처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푸틴 대통령의 초상화를 들고 있다. AFP=연합뉴스

바그너그룹이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를 향해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 가운데 24일(현지시간) 모스크바 붉은광장 근처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푸틴 대통령의 초상화를 들고 있다. AFP=연합뉴스

다만, 바그너그룹이 빠진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러시아군이 패퇴하거나 수세에 몰릴 경우 상황은 복잡해질 수 있다. “내년 3월 17일 러시아 대선에 영향이 불가피하다”는 관측이 나오는 배경이다.

푸틴이 ‘주인을 문 사냥개’ 격인 프리고진과 바그너그룹을 어떻게 처리할지도 주목된다. 전문가들은 “결국 바그너그룹은 해체 수순을 밟을 것”으로 예상한다.

바그너그룹을 바라보는 러시아 측의 마음은 복잡하다. 바그너그룹은 러시아 정규군을 대신해 중동ㆍ아프리카ㆍ중남미 각지로 보내 내전과 군사훈련에 투입되는 등 여러 군사작전을 감행했다. 국제사회로부터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일종의 ‘회색지대 전략’이었다.

러시아의 국익이 결부된 상황에서 PMC를 활용하는 방식을 쉽게 포기하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장 위원은 “러시아 정부는 PMC를 확대하고 국방부와 정식계약을 맺도록 하는 등 바그너그룹의 독점적인 지위를 해체하기 위한 여러 조치를 실시해왔다”며 “바그너그룹의 경우, 프리고진 등 지도부를 교체하고 기업명을 바꾸는 선에서 존속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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