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군산 문학|「쌀 집산지」 모여든 민초의 애환 간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백마강은 공주 곰나루에서부터 시작하여 백제 흥망의 꿈 자취를 더듬어 흐른다. 풍월도 좋거니와 물도 맑다. 그러나 그것도 부여 전후가 한참이지 강경에 다다르면 장꾼들의 흥정하는 소리와 생선 비린내에 고요하던 수면의 꿈은 깨진다. 물은 탁하다. 예서부터가 옳게 금강이다.
향은 서서남으로 밋밋이 충청·전라 양도의 접경을 골타고 흐른다.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바다에다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 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그러나 항구래서 하룻밤 맺은 정을 떼 치고 간다는 마도로스의 정담이나, 정든 사람을 태우고 멀리 떠나는 배 꽁무니에 물결만 남은 바다를 바라보면서 갈매기로 더불어 운다는 여인네의 그런 슬퍼도 달코롬한 이야기는 못된다."
군산이 배출한 소설가 채만식이 그의 대표작 "탁류" 서두에서 묘사했듯 군산은 낭만적인 항구도시가 아니다. 호남평야 등 드넓은 들녘을 거쳐온 금강과 일본이나 중국을 바라는 황해가 만나는 군산은 민족의 목숨이나 다름없는 쌀을 지키고 빼앗긴 역사로 일관하고 있다. 삼남지방에서 수확된 쌀을 금강을 타고 모아 바닷길로 해 대동강·한강 줄기를 타고 개성·한양 등지로 올려보내던 군산에는 고려조부터 쌀을 왜구 등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진이 설치됐다.
그러다 일제 때는 한반도의 쌀을 빼내고 일본의 소비재를 팔기 위한 전형적 식민지 수탈현장이 되고 말았다.
중앙에든, 외세에든 풍요로운 들녘의 삶을 빼앗긴 민초들이 맨주먹으로와 등짐꾼·배꾼으로 일궈낸 인구 28만 명의 군산은 때문에 향수 어린 들녘의 볏 바람과 곤혹한 현실의 비릿한 갯바람이 함께 부는 도시다.
"밤새 새순으로 돋아나는/바람은/무거운 귀가를 서두르는 골목에서/신발 속으로 들어서는/눈과 눈 귀와 귀들의 아픔을/빗질하며/슬라브 지붕 저쪽에 걸쳐있는/우리들의 외침이/깃발처럼 나부끼는/한 시대의 고통을 나누고 있다." (이복웅 씨의 "바람의 산실" 전문)
항구도시에다 서해안 산업도시로서 일자리가 많아 일용할 양식을 찾기 위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떠나곤 하는 도시 군산. 수탈의 역사와 아직도 피곤한 민초들의 삶을 간직하고 있는 군산은 어느 이념에도 휩쓸리지 않은 건강한 자생적 민중문학의 산실이 됐다.
군산 문단은 채만식(1902∼1950)으로부터 열린다. 군산에 인접한 옥구에서 출생한 채만식은 대부분의 문필활동을 서울에서 했지만 일제 하 군산을 무대로 암울한 이 민족의 삶을 리얼하게 파헤친 "탁류"로 이 고장 문학의 정신적 지주가 됐다. 그의 문학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현실 비판의식은 특히 1970년대 참여 문학이 강하게 일면서 그로 하여금 우리 문학사의 중심을 정하게 하며 현실과 유리되지 않은 오늘의 군산문학의 정신이 되게 했다.
해방 후 군산 문단은 「군산문학회」에 의해 태동된다. 민족 혼란기에 참다운 항도정서를 가꿔나가자며 이병훈·김호연·이병권·박희선·권오동·장윤철 등 20∼30대 젊은 문인들이 1947년 출범시킨 군산 문학회는 군산 문학을 가꾸기 위해 이 고장을 주제로 한 연시 등을 쓰기도 했으나 6·25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 후 6·25 폐허 위에서 전후 상실된 인간성 회복과 허무·혼란의 불안감을 정서를 통해 해소하자는 표어를 내걸고 1955년 「토요 동인회」가 결성됐다. 송기원·김순근·정윤봉·원형갑·이병훈·원용봉·정연길·조아설 등이 동인으로 참여한 토요 동인 회는 시내 다방에 시단을 만들어 시를 게시하기도 하고 문학 강좌도 열고 시화전도 열어 전후 황폐화된 군산 시민의 정신을 위무했다. 또 동인지 "토요 문단"도 2집까지 내며 5년 간 활동하다 해체됐다. 그 뒤 2년 후인 1961년 이병훈 씨 주도로 「토문 동인회」가 탄생됐으나 2년을 못 넘기고 해체됐다.
그 후 군산의 문학 활동은 예총군산지부가 맡아 오다 1968년 시 전문 동인 「시화회」가 출범하게 된다. 저항하는 시대정신을 내걸고 고헌·이병훈·김민성·문효치·박순호·이원철·이복웅·강상기·이양근 등 이 고장 문인 대부분이 참여한 시화회 동인은 1년 후 발전적으로 해산, 69년 문협군산지부를 발족시키게 된다.
회장 김기경씨를 비롯, 현재 회원 23명으로 군산의 문인 전부를 회원으로 갖고있는 군산 문협은 군산의 유일한 기성 문인단체다. 선후배 관계가 엄연하고, 또 순수·민중문학의 분리를 부질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삶과 문학이 결부된 군산 문단은 군산 문협 결성 후 별다른 동인으로 가지치기 없이 가족적 분위기로 20여년 간 내려오고 있다.
기성문인들로서 향토문학의 특성을 살리면서 문학 저변확대를 위해 군산 문협이 펼치고 있는 주요행사로는 초·중·고·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백일장과 주부 백일장, 해변 문학교실, 「시와 육성」이란 표제 아래 시민들에게 시인의 목소리를 전하는 문학의 밤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또 85년 채만식 생가 터에 기념비를 세워 향토 문학의 뿌리와 정신을 새롭게 함과 아울러 연간으로 기관지 "군산문학"을 펴내고 있다.
군산에는 여전히 바람이 드세다. 서해안 개발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빠져나간다. 때문에 뿌리나 문화에 대한 의식이 약하다. 지방문화는 무릇 대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마련인데 인구 28만 명이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종합대학하나 없는 곳이 군산이다.
이러한 척박한 풍토에서 자라난 군산문학, 나아가 군산 시민문화를 위해 문화의 주춧돌이라 할 수 있는 문학에 대한 지원이 아쉽다는 것이 군산 문인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군산=이경철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