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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정애의 시시각각

“대통령에게 배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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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고정애 기자 중앙일보
고정애 Chief에디터

고정애 Chief에디터

“제가 진짜 많이 배우는 상황이다.” 이주호 부총리가 며칠 전 윤석열 대통령을 두고 “입시에 대해 수도 없이 연구하고 깊이 있게 고민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며 한 말이다. 박대출 국민의힘 정책위의장도 “대통령은 수십 년 동안 검사 생활을 하면서 입시 비리 사건을 수도 없이 다뤄 봤고, 특히 조국 일가의 대입 부정 사건을 수사 지휘하는 등 대입 제도에 누구보다 해박한 전문가”라고 말했다.

뭐지 싶을 수 있겠으나, 옛날부터 대통령 주변에서 듣게 되는 두 종류 말 중 하나가 이런 유다. “대통령이 정말 많이 안다”는 것이다. 대개 진담이다. 나머지 하나도 궁금할 수 있겠는데, 대통령의 애국심이다. 달리 말하는 사람을 이제껏 한 명 봤는데, 이공계 출신 인사였다. 그는 “수십 년 종사한 내가 당연히 대통령보다 더 알지 않겠나. 대통령이 제대로 된 전문가를 써야 한다”고 소리 높였다.

윤 대통령 장악력 높아진 가운데
부총리·장관 전언 정정하는 일도
대통령 뜻만 보여 만기친람 우려

그러고 보면 윤 대통령의 2년 차 커브도 역대 대통령들과 다르지 않다. 국정 전반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면서 장악력도 단단해지는 단계 말이다. 윤 대통령 특유의 캐릭터도 분명해지고 있다. 무엇보다 다변(多辯)이다. 주변과 인식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하다. 다만 밖으로까지 최종적(final say)이어야 할 대통령 발언이 다수, 그것도 직접 인용 형태로 나오는 건 대단히 이례적이다. 과거엔 발언이 귀했고 그나마 정무적 판단을 거친 게 많았다. ‘날것’은 금기였다. 이명박(MB) 대통령 시절 MB가 “재벌 2, 3세 본인들은 취미로 할지 모르겠지만 빵집을 하는 입장에선 생존이 걸린 문제”라고 말했다고 전한 참모는 시말서를 썼다.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21일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정부서울청사에서 공교육 경쟁력 제고방안 브리핑을 하고 있다. 뉴스1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21일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정부서울청사에서 공교육 경쟁력 제고방안 브리핑을 하고 있다. 뉴스1

윤 대통령 주변엔 구구절절 전하는 사람이 많다. 실세연하는 사람들 중에도 있다. 근래 싱하이밍 대사를 두고 윤 대통령이 “우리 국민이 불쾌해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전한 참모도 있다. 대통령이 사석에서 얼마든 개탄할 수 있지만, 구체적인 언급까지 공개된 건 문제였다. 대통령이 다른 나라 국장급을 언급한 격이어서다. 과거라면 시말서 한 장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윤 대통령 스스로 자신의 발언이나 의중(때론 인사 문제)이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았다고 여길 때 공개적으로 정정하곤 하는데 이 또한 못 보던 현상이다. 이정식 노동부 장관의 근로시간 개편안이나 이주호 부총리의 수능 발언이 예이겠다. 특히 이번 수능을 두고 이 부총리가 전한 발언이 사실과 다르다며 “공교육 교과과정에서 다루지 않는 분야의 문제는 수능 출제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바로잡기도 했다. ‘쉬운 수능’으로 해석되자 반박한 것이다. 현실에선 그러나 “학교 교육과정에서 출제한다는 지극히 당연하고 원론적인 대통령의 지시는 현실에서는 변별력 낮은 쉬운 수능을 의미”(김경범 서울대 교수)한다. 이러니 대통령의 공개적 개입이 더한 혼선을 부른다.

윤 대통령이 복잡다단한 이면을 단순화해 범죄냐 아니냐, 불법이냐 아니냐 등의 이분법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 또한 특이한 점이다. ‘건폭’ ‘이권 카르텔’ ‘사교육 카르텔’식 규정이 대표적이다.

이전 대통령들과 완연히 다른 스타일이나 귀결점은 유사하다. “각 부처 장관에게 전권을 부여하되 결과에 대해 확실히 책임지도록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사실상 대통령의 의지만 도드라져 보인다. 바로 한국 대통령제의 문제로 여겨지는 만기친람(萬機親覽) 양태다.

대통령 집무실에 있는 명패(the Buck Stops here!·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의 주인공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일화를 전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서유럽 원조계획을 두고 참모는 ‘트루먼 콘셉트’나 ‘트루먼 플랜’으로 불러야 한다고 권했다. 트루먼은 국무장관인 마셜이 충분히 자격이 된다며 이렇게 말했다. “만일 내 이름으로 상원과 하원에 보내진다면 어느 것이나 두어 차례 떨다가 죽을 것이다”(강성학). 마셜 플랜의 성공은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대통령 트루먼의 업적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