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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정호의 시시각각

부산 엑스포와 ‘직지(直指)’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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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다음 달 16일까지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서 전시되는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직지). [뉴스1]

다음 달 16일까지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서 전시되는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직지). [뉴스1]

“박람회 때 도와준 공로가 있으니 특별히 훈1등에 올려 서임하고 태극장(太極章)을 수여하라.” 『고종실록』 39년(1902년) 10월 20일의 기록이다. 여기서 박람회는 1900년 열린 파리 만국박람회, 훈장을 받은 사람은 프랑스 외교관 콜랭 드 플랑시다. 플랑시는 세계 최초 금속활자 책으로 꼽히는 『직지(直指)』를 조선에서 구입해 파리박람회에 내놓았다. 고려 말기인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된 『직지』를 서방에 처음 소개했다.

1900년 파리박람회에 첫선 ‘직지’
옛 금속활자는 이 시대의 반도체
“보고 싶은 것만 보지 마라” 일침

 플랑시는 두 차례에 걸려 13년간 조선에서 근무했다. 그가 『직지』를 수집한 시기나 경위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파리박람회를 위해 1899년부터 1년간 휴가를 냈기에, 그 이전에 구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종 또한 박람회에 적극적이었다. 국제사회에 대한제국을 알리고 선진 문물을 수용하는 기회로 삼았다. 당시 파리박람회에는 조선의 악기·공예품·도자기·자수·의복 등이 출품됐다. 한옥 양식의 한국관도 세웠다. 『직지』는 경매를 거쳐 1950년께 프랑스 국립도서관(BnF)에 기증됐다. 현재 BnF에서 열리고 있는 ‘인쇄하다! 구텐베르크의 유럽’ 특별전(7월 16일까지)에 50년 만에 일반 공개됐다.
 지난 20일(현지시간) 파리 인근에서 열린 2030년 세계박람회(엑스포) 유치전에 한국의 정치·경제·문화계 인사가 대거 출동했다. ‘Busan is ready’를 기치로 2030년 엑스포 부산 유치를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윤석열 대통령도 직접 프레젠테이션(PT)하며 부산에 대한 각국의 지원을 호소했다.
 싸이·조수미·카리나 등 글로벌 스타가 가세한 이날 PT에서 프랑스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가 깜짝 등장했다. 산과 바다, 자연과 현대가 공존하는 부산의 매력을 알리는 홍보영상에 나왔다. 이화여대 캠퍼스, 여수엑스포 본관 등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페로가 세계적 건축가로 발돋움한 계기가 된 작품이 1995년 완공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 중 하나인 BnF다. 마침 이곳에서 『직지』가 전시 중인데, 안타깝게도 이번 엑스포 유치전 이벤트에서 전혀 조명받지 못했다.
 윤 대통령은 PT에서 “첨단 엑스포, 문화 엑스포 구현”을 전 세계에 제시했다. 그 바쁜 일정에서도 『직지』 전시 현장을 찾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30분 PT 영상에 『직지』 관련 대목을 짧게나마 포함하는 방안도 고려했을 법하다.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이라는 국수주의적 발상에서가 아니라 『직지』만 한 당대 최고(最高)의 이기(利器)도 드물었다는 세계문화사적 차원에서다. 프랑스에 시집 보낸 『직지』의 어버이 나라로서 그만한 살핌은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더욱이 『직지』와 엑스포는 123년이란 장구한 인연을 맺어왔기에….
 『직지』의 미스터리를 추적한 김진명 작가의 동명 소설에서 금속활자는 이 시대의 반도체에 비유된다. 지식·정보의 첨단 전달·저장매체라는 점에서다. 또 역대 선불교의 가르침을 간추린 『직지』는 낡은 진영 싸움에 매몰된 이 시대의 소통에 대해서도 따끔한 가르침을 준다. 소설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 『직지』가 세계 최고라는 것만 주장하다 보니 막상 그 내용이 무엇인지에는 관심도 없었어요. 『직지』는 한마디로 마음을 바로 보면 그곳에 길이 있다는 것이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요즘 세상에 귀감이 되는 말이 많이 담겨 있지요,”
 윤 대통령은 이번 PT에서 “부산 엑스포는 경쟁의 논리에서 연대의 가치로 우리의 관점을 전환한 엑스포로 기억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아집과 대립, 독선과 불통의 국내 정치판에도 그대로 적용할 문구다. 박진 외교부 장관은 이번 엑스포 유치를 ‘9회 말 대역전극’에 견줬다. 하지만 9회 말 역전극은 가뭄에 콩 나기다. 평소 수비·공격력 없인 불가능하다. 내치가 단단해야 외교도 튼실할 터, 646년 전의 『직지』가 지금 우리에게 전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