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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미신고 2236명…베이비박스에 1000명, 나머지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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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병원의 출산기록은 있으나 출생신고가 안 된 아동들에 대한 전수조사가 실시된다. 경기도 수원시에서 발생한 영아 살해·시신 유기 사건과 관련한 정부 조치다.

이기일 보건복지부 제1차관은 22일 정부서울청사에서 긴급 브리핑을 열고 “감사원의 감사 내용에 따라 경찰청·질병청·지자체 등 관계기관과 협의해 출생신고가 되지 않아 의료기관에서 발급한 임시신생아번호만 있는 아동의 소재·안전 확인을 위해 전국적인 전수조사를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복지부는 먼저 감사원이 파악한 미신고 아동 2236명(2015~2022년생)에 대한 전수조사를 진행하고 추후 조사 대상을 넓힐 계획이다. 이 차관은 보다 근본적인 해결 방안 마련을 위해 아동이 출생신고에서 누락되지 않도록 의료기관의 출생기록이 지자체에 자동 통보되는 ‘출생통보제’와 익명으로 출산할 수 있도록 산모를 지원하는 ‘보호출산제’가 조속히 도입되도록 관련 부처, 국회와 긴밀히 협의하겠다고 설명했다.

경찰, ‘냉장고 영아시신’ 친모에 영장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앞서 지난 21일 경기도 수원의 한 아파트 냉장고에서 영아 2명이 숨진 채 발견됐다. 각각 2018년, 2019년 출생 직후 친모 고모씨에게 살해된 것이다. 이 아기들은 출생신고가 돼 있지 않아 그동안 세상에 존재가 드러나지 않았다. 수원지검은 22일 영아 살해 혐의로 고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복지부는 지난 4월부터 필수 예방접종을 받지 않은 만 2세 이하 1만1000여 명에 대해 아동학대 여부를 전수조사했다. 지난 2월 인천시 미추홀구의 한 빌라에서 20개월 남자아이가 학대 끝에 사망한 사건이 계기가 됐다. 하지만 복지부의 조사 대상은 주민등록번호가 있는 아이로 한정돼 수원 두 아기같이 출생신고조차 되지 않은 아이들은 사각지대에 남았다.

사각지대의 ‘유령 아동’은 감사원 감사 결과 드러났다. 감사원은 지난 3월부터 두 달간 복지부에 대한 정기 감사에서 위기 아동 관리 실태를 점검했다. 감사원 관계자는 “이 과정에서 출생신고가 안 된 아이들이 방치되고 있다고 봤다”고 설명했다. 감사원이 이들을 파악하기 위해 사용한 건 일곱 자리 ‘임시신생아번호’였다. 병원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생후 12시간 이내에 B형 간염 예방접종을 한다. 출생 직후 아기들은 주민번호가 없기 때문에 접종 시 질병관리청으로부터 일곱 자리 ‘임시신생아번호’를 받는다. 병원에서 태어난 수원 두 아기도 이 번호를 받았다. 이 번호에는 아이의 출생일·성별·출생병원·보호자 인적사항이 함께 기록되고, 이후 보호자가 출생신고를 하면 주민등록번호로 자동 전환된다. 감사원 관계자는 “임시신생아번호가 (주민번호로 전환되지 않고) 아직 있다는 건 출생신고가 안 됐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조사 결과 2015년에서 2022년 사이 태어난 아기 2236명의 임시신생아번호가 유지되고 있었다.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감사원이 이 중 23명을 선별해 조사하는 과정에 수원 두 아이 등 총 4명의 아이가 사망한 것으로 드러났다. 나머지 2명 중 1명은 지난해 경남 창원에서 생후 76일께 영양결핍으로 사망한 사례며, 다른 한 명은 2015년 전남 여수에서 출생 직후 호흡곤란으로 순천의 한 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받던 중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유기 의심 사례도 발견됐다. 감사원이 화성시와 함께 조사한 사례에서 2021년생 아이를 출산한 보호자가 “아이를 익명의 제3자에게 넘겼다”고 진술하는 등 의심스러운 정황이 포착돼 경기남부경찰청이 아동복지법 위반 혐의로 입건해 수사 중이다. 2015년에 태어난 또 다른 아이는 출생 직후 보호자가 베이비박스에 유기한 것으로 드러났다.

전문가들은 출생신고되지 않은 아이들의 상당수가 베이비박스를 통해 유기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베이비박스를 운영 중인 재단법인 주사랑공동체는 2015~2022년 베이비박스를 통해 1418명의 아이가 들어왔다고 22일 밝혔다. 1418명 중 친모가 출생신고를 거부한 1045명은 미아신고가 됐다. 이 경우 아이가 시설에 가거나 입양이 돼도 서류상에는 임시신생아번호가 남아 있다. 주사랑공동체 관계자는 “베이비박스 사례를 제외한다면 적어도 1000여 명의 아기가 ‘유기에 의한 사망’했거나 ‘불법 인터넷 입양거래’가 이뤄졌을 것으로 짐작된다”고 말했다.

‘출생통보제’ 등 몇년째 국회 계류 중

현재 국회에선 아이가 태어난 의료기관이 지자체장에게 의무적으로 출생을 알리도록 하는 가족관계등록법 개정안이 여러 건 발의된 상태다. 최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21년 3월, 김미애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 3월 발의한 개정법안은 아직 소관 상임위인 법사위에서 논의도 제대로 안 되고 있다.

대한의사협회(의협)는 “산모를 더 위험한 출산으로 내모는 제도”라고 반발하고 있다. 김이연 의협 홍보이사는 “스스로 출생신고를 하지 않는 산모는 미혼모·미성년자 출산 등으로 공개를 꺼리는 경우가 많다”며 “병원이 그들의 출산을 강제로 지자체에 통보하는 건 화장실 출산 같은 위험한 출산으로 산모를 내모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출산 사실 공개를 꺼리는 산모가 위험한 출산으로 내몰릴 것에 대한 대안으로 제기되는 게 ‘보호출산제도’다. 아이를 출산한 산모의 정보를 비공개하고, 산모가 아이를 기르지 못할 경우 지자체에 안전하게 인도할 수 있게 지원하는 내용이다. 조규홍 복지부 장관은 이날 “보호출산제는 출산통보제를 보완하는 방안이라 두 법이 빨리 진행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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