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느낌] 간만에 '물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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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물건'이 나왔다. 23일 개봉하는 전계수(34) 감독의 데뷔작 '삼거리극장'이다. 박찬욱 감독이 "요즘 영화 중 최고"라고 손가락을 치켜세운 것이 과장이 아니다. 한국 영화의 불모지인 뮤지컬에서 만만치 않은 성취를 이뤘고, 무엇보다 판타지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배짱이 돋보인다. 올 7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개막작으로 선보여 입소문이 자자했던 영화다.

한밤중 낡은 극장에서 벌어지는 귀신 유랑극단의 춤과 노래의 향연에, 과연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질문까지 얹었다. 10억원이 못 되는 제작비의 한계를 아이디어와 상상력으로 돌파한 저예산영화의 모범이라 할 만하다. 키치와 B급영화, 코미디와 호러, 뮤지컬 등 장르를 분방하게 오가며 지금껏 충무로에 없던 새로운 메뉴를 내놓은 전 감독은 영화.연극.춤.미술 등을 두루 경험한 준비된 신예다.

소녀 소단(김꽃비)은 활동사진을 보러간다는 말만 남기고 사라진 할머니를 찾아 낡은 삼거리극장으로 간다. 자살 충동에 시달리는 우기남 사장(천호진)을 비롯해 어딘지 기괴한 분위기의 극장이다. 소단은 매표소 직원으로 취직하는데, 낮에는 뚱한 극장 직원들이 밤이면 유령으로 돌변해 활기찬 파티를 벌이는 것을 알게 된다. 못생긴 매점 아줌마에서 밤이면 삼거리 최고의 가수로 변신하는 에리사(박준면)와 농락당한 슬픈 기생 출신인 완다(한애리), 광대 복장으로 막강 입담을 과시하는 모스키토(박영수), 식민시대 일본 중위 히로시(조희봉)다. 소단은 이들을 통해 우기남 사장과 극장에 충격적인 비밀이 있음을 알게 된다.

전체가 뮤지컬은 아니지만 9곡의 창작곡은 몽환적이면서 키치적인 영화 분위기를 이끌기에 부족함이 없다. 최근 '다세포 소녀' '구미호가족' 등에서 2% 부족했던 음악적 취약함을 너끈히 따라잡았다. 욕설과 속어.현학적 문어체를 오가는 노랫말, 박준면.한애리 등 뮤지컬 스타들이 던지는 시원한 가창력도 일품이다.

영화는 영화의 존재 자체에 대한 질문도 담았다. 우기남은 외골수 감독의 자의식을 반영하는 인물. "끔찍한 세상을 엿 먹일 끔찍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그는 "무너진 꿈의 공장, 야만의 환영이여" 같은 시적인 대사를 퍼부어댄다. 영화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소머리 인간 미노수'는 미노타우로스와 프랑켄슈타인을 결합한 흥미로운 캐릭터다.

전 감독은 "끈질기게 재미있는 영화, 100% 농담영화"라고 자신의 작품을 소개했다. 부천영화제 한상준 프로그래머는 "한국 영화계에 던지는 강력한 도전장"이라는 호평을 내놨다.

"살아 있는 시체들이여 모두 일어나 기나긴 혼돈의 시간을 떨치고 저주의 긴 그림자를 끌고서 모든 따분한 영혼에 깃들지어다 아아." 삽입곡 '삼거리극장'의 이 노랫말이 바로 영화의 주제다. 초반부 다소 어색한 느낌을 참아내면 판타지의 쾌감이 유감없이 밀려오는 영화다. '웰컴 투 판타지 월드!'.

양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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