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국회­두가지 궁금증/권영빈(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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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예산국회가 열리고 있다. 나라 한해의 살림살이 규모를 결정하는 일이다. 나라정책의 대소경중을 가려 미흡한 쪽은 북돋우고 넘치는 쪽은 들어내고 불필요한 부분은 도려내는 일이다.
이런 예산국회를 지켜보면서 두가지 궁금증을 풀 길이 없다. 워낙 정치와 경제에 문외한인 탓이라해도 납득할 수 없는 두가지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되고 특단의 방법까지 강구해서라도 범죄와 폭력의 뿌리를 뽑겠다는 대통령의 의지가 천명되었지만 아직도 생매장·토막살인·화성살인에 이어 폭력공포증을 이기지 못해 어린 소년이 자살을 할만큼 사회는 폭력과 범죄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오늘이다.
그런데 어째서 내년 민생치안 예산은 올해보다 25%가 줄었고 추경예산까지 합치면 70%나 줄어들었을까. 내년이면 폭력과 범죄가 사라진다는 보장을 받은 탓인지 이를 우려하고 이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국회에서 나오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이게 첫번째 의문이다.
폭력이 난무하고 범죄가 들끓을 때마다 날아다니는 범죄기술에 기어가는 경찰장비를 나무랐고 범죄와 싸워야 할 일선 경찰의 박봉과 사기저하가 치안공백의 근원적 문제로 제기된지 이미 오랜 일이다.
도시근로자 평균임금의 절반수준인 30만원대의 월급을 받는 하위직 경찰에 정의의 사도 슈퍼맨의 활약을 기대하고 깨끗한 공인의 자세를 요구한다는 게 애당초 잘못된 기대요,환상이었다.
그런데도 하위직 경찰의 봉급을 올려야 한다는 소리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수사의 과학화를 위한 예산도 줄어들었고 장비확보 예산도 대폭 삭감되었다는 보도다.
두번째 궁금증은 문화부의 예산편성이다. 문화입국과 문치교화를 내세워 문화부가 발족된지 1년이 되어간다. 첫해는 발족 원년이니까 그렇다치더라도 내년 예산도 올해와 대차없는 한 고을의 재정규모로 편성되었다.
거창한 문화발전 10개년계획이 발표되었고 문화의 기반시설과 공간확보가 팡파르를 울리며 터져 나왔는데도 막상 그 일을 추진할 재원은 아무일도 하지 않은 금년 수준으로 끝났다. 전체 예산이 20% 증가된 것에 비하면 그만큼 줄어든 셈이다.
정부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떠벌리고 나팔만을 불었지 이를 추진할 능력도,생각도 없음을 결과적으로 시인한 꼴이 되어 버렸다.
왜 문화정책이 필요했고 무엇때문에 문화부가 발족되었는지 정부 스스로 잊어버린 탓인가. 한글날을 알리는 풍선을 띄우고 소월의 달을 지정하면서 통일제 굿판을 벌이고 전시효과를 노린 이벤트사업만 벌이면 문화정책이 실현된다고 보는 탓인가.
정부가 왜 문화정책을 펴야 하는가를 다시 한번 되짚어 볼 필요가 여기서 생겨난다.
송복 교수의 최근 역저 『한국사회의 갈등구조』에 따르면 이 사회가 갈등과 분열의 상태를 지나 치열한 「전투사회」로 몰아가는 데는 여섯가지 기본적 갈등구조가 깔려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권력갈등,계급갈등,노사갈등,이념갈등,윤리갈등,지역갈등이 그것이다.
이 갈등구조가 서로 얽히고 설켜 복잡다기한 형태로 나타나면서 때로는 폭력과 분열로 확산되고 때로는 범죄와 혼란으로 바뀌어질 것이다.
경쟁과 이익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는 산업화·공업화시대에 싫든 좋든 들어선 이상 이런 갈등구조는 더욱 첨예화되고 심화될 뿐이다. 바로 이 역기능을 순기능으로 조화·순화시키는 장치중의 하나가 바로 문화정책이라고 본다.
3년째 우리사회가 겪고 있는 분열과 혼란,폭력과 범죄의 척결은 단기적으로는 경찰력에 의존해야 하고 장기적으로는 문화적 치유에 기대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의 우리 사회상과 비견되는 혼란과 혼돈의 시대가 좌전과 열국지에 등장하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였다. 그 시대는 비록 농경사회였지만 군신과 부자의 관계가 허물어지고 사회기강과 인륜이 끊어져버린 패덕의 사회였으며 나라와 나라가 먹고 먹히는 치열한 전투적 사회였다. 이 혼돈의 시기에서 태어난 철학이 공자의 인예악의 사상이었다.
경쟁과 이익 다툼으로 망가진 사람간의 관계를 사랑(인)으로 감싸고 무너진 사회규범을 질서(예)로 회복하면서 상처난 마음을 음악(악)으로 감싸주는 게 그의 기본철학이다. 평화시에 태어난 안일한 사상체계가 아니라 갈등과 혼란을 겪으면서 나타난 난세의 치유책이다. 그는 일찍이 이렇게 역설했다.
『사람의 내면에 깃들이는 감정과 외면에 나타나는 행동을 조절하여 그사이에 균형이 있도록 하는 것이 음악과 예절이 하는 일이다. 예절이 수립되면 질서와 규율이 확정되고 음악과 가요가 널리 보급되면 국민들 사이에 평화로운 분위기가 조성된다.』(예기에서)
사랑이 종교·도덕차원의 운동이라면 질서회복은 경찰의 몫이고 음악으로 대표되는 문화는 문화부가 추진해야할 정책이다. 질서(예)의 회복이 경찰에 달려있다면 문화(악)의 진흥은 문화정책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처럼 경찰의 역할과 문화의 기능은 전혀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이 사회의 중병을 치유하는 장단기적 방법상의 차이일 뿐이다.
농경사회의 공자시대에 이미 이런 치유책이 등장했다면 경쟁과 이익이 어느 때보다 첨예화된 산업화사회에서 예악의 정치는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강화되어야 할 일이다.
경쟁과 이익의 전투사회가 쏟아낸 긴장과 갈등을 해소하고 폭력과 범죄의 근절을 위해 장기적으로는 문화예산이,단기적으로는 민생치안 예산이 늘어나야 했다.
극단적 표현이 허락된다면 경찰의 박봉과 문화정책의 부재가 곧 이 사회의 갈등과 범죄를 방치하고 확산시킨다고 주장하고 싶다.
그런데 어째서 오늘의 예산국회는 침묵만 하고 있는지 그 궁금증이 풀리지 않는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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