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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대밭 속 달려갔다…'100년 앙숙'도 손 잡게한 '지진 외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대지진으로 쑥대밭이 된 튀르키예(터키)·시리아에 전 세계가 구호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 그간 두 나라와 갈등을 빚어온 국가들도 구호에 적극 동참하면서 외교 관계 개선 조짐이 나타나는 등 ‘지진 외교’의 새 장이 열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15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과 유로뉴스 등에 따르면, 이날 메블뤼트 차우쇼을루 튀르키예 외무장관과 아라랏 미르조얀 아르메니아 외무장관이 튀르키예 수도 앙카라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경 개방을 포함해 양국 관계를 완전히 회복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양국은 관련 회담을 진행 중이라 설명했다.

메블뤼트 차우쇼을루 튀르키예 외무장관(왼쪽)과 아라랏 미르조얀 아르메니아 외무장관이 15일 앙카라에서 만나 악수하고 이싿. AFP=연합뉴스

메블뤼트 차우쇼을루 튀르키예 외무장관(왼쪽)과 아라랏 미르조얀 아르메니아 외무장관이 15일 앙카라에서 만나 악수하고 이싿. AFP=연합뉴스

1915년 이후 앙숙, 아르메니아의 구호

차우쇼을루 튀르키예 장관은 “아르메니아는 어려운 시기, 우리에게 우정의 손길을 내밀어 연대와 협력을 보여줬다”면서 “이 연대는 계속돼야 한다”고 말했다. 미르조얀 아르메니아 장관도 “튀르키예와 완전한 관계 정상화 및 국경 개방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국경을 맞댄 두 나라는 1915년 ‘아르메니아 대학살’로 계기로 100년 이상 갈등을 이어온 앙숙 관계다. 아르메니아 대학살은 튀르키예의 전신인 오스만제국이 자국 내 아르메니아인 150만 명을 살해·추방한 사건을 말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안보 동맹국인 튀르키예의 강력한 반발에도 이 사건을 ‘제노사이드(genocide·인종청소)’로 규정하며 기정사실화했지만, 튀르키예는 “1차 세계대전 중 사망자일 뿐이며 조직적인 살해는 없었고 수치 역시 과장됐다”며 반박해왔다. 또 튀르키예는 아르메니아와 전쟁 중인 아제르바이잔을 지원하기 위해 1993년 아르메니아와 단교했다.

2020년 아레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전쟁 때 러시아 평화유지군의 모습. AP=연합뉴스

2020년 아레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전쟁 때 러시아 평화유지군의 모습. AP=연합뉴스

하지만 아르메니아는 대지진이 발생한지 5일 만인 지난 11일 국경을 개방해, 육로를 통해 튀르키예로 구호품이 전달될 수 있게 도왔다. 세르다르 클르츠 전 주미(駐美) 튀르키예 대사는 이날 “100t에 달하는 식량과 의약품, 물 등 구호품을 실은 화물차 5대가 아르메니아의 알리칸 국경 지점을 통과했다”며 “영원히 기억하겠다”고 트위터에 글을 올렸다. 14일엔 구호품 트럭이 두 번째로 이 국경을 통과했다. 아르메니아는 생존자 수색을 돕기 위해 튀르키예에 27명의 구조대도 파견했다.

껄끄러운 그리스·이스라엘도 달려와

팔레스타인 문제를 두고 반목 중이던 이스라엘과의 관계도 호전 중이다. 전날 차우쇼을루 장관은 엘리 코헨 이스라엘 외무장관과 기자회견에서 “이스라엘 구호대가 19명을 구조했다”며 “어려운 시기에 연대해줘 정말 감사하다”고 말했다. 코헨 장관은 “두 나라는 다양한 분야에서 관계를 강화할 것”이라고 답했다.

양국은 항공 직항편을 재개하기로 했다. 주요 이스라엘 항공사가 조만간 튀르키예에 취항할 예정이다. 이스라엘과 튀르키예는 지난해 8월 외교 관계를 복원했지만, 국민 대다수가 이슬람교인 튀르키예에선 반(反) 이스라엘 시위가 이어지는 등 감정의 골이 깊었다.

엘레 코헨 이스라엘 외무장관(왼족)이 14일 앙카라에서 차우쇼을루 튀르키예 장관과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엘레 코헨 이스라엘 외무장관(왼족)이 14일 앙카라에서 차우쇼을루 튀르키예 장관과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에게해의 영원한 앙숙’인 튀르키예와 그리스의 관계도 개선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두 나라는 지중해의 작은 무인도인 이미아섬(튀르키예명 카르다크섬)을 둘러싼 영토 분쟁으로 갈등해왔다.

그리스는 튀르키예 강진 발생 불과 몇 시간 만에 수색·구조 특수팀을 급파했다. 또 C130 군용 화물기로 구호품과 의료용품, 탐지견, 의사, 지진학자 등을 보냈다. 그리스 시민단체들도 기부금을 모아 수천개의 텐트와 담요, 붕대, 기저귀, 분유, 세면도구 등을 지원했다.

시리아 퇴출한 아랍연맹, 구호 손길 

시리아와 아랍국가 간에도 화해 분위기가 조성 중이다. 아랍연맹(AL)은 지난 2011년 내전 발발 이후 시리아를 퇴출했고, 사우디아라비아를 포함한 일부 회원국은 시리아와 단교했다. 하지만 대지진이 일어나자 사우디아라비아는 14일 의약품 35t을 실은 항공기를 시리아 알레포에 보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항공기가 시리아에 착륙한 건 내전 초기인 2012년 2월 이후 처음이다.

15일엔 아이만 사파디 요르단 외무장관이 시리아를 방문해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을 만나 지진 피해 지원 방안을 논의했다. 요르단 외무장관이 시리아를 방문한 것 역시 내전 이후 처음이다. 압델 파타 알시시 이집트 대통령은 강진 발생 직후 알아사드 대통령과 통화하고 구호 지원을 약속했다. 알아사드 대통령은 15일 “아랍 형제들의 긍정적인 반응을 환영한다”고 성명을 냈다.

시리아 알레포 공항에 사우디아라비아가 보낸 인도주의적 구호품이 도착했다. AP=연합뉴스

시리아 알레포 공항에 사우디아라비아가 보낸 인도주의적 구호품이 도착했다. AP=연합뉴스

“스웨덴·핀란드, ‘지진외교’ 덕 못볼듯”

한편 튀르키예의 반대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에 발목 잡힌 스웨덴·핀란드는 튀르키예에 인도적 지원을 하며, 나토 가입에 물꼬가 트이길 바라고 있다고 유로뉴스는 전했다. 스웨덴은 지금까지 3300만 유로(약 453억 원)의 인도적 지원을 제공하고 50명 이상의 수색·구조 전문팀과 수색견, 의료팀을 튀르키예에 파견했다. 핀란드는 3000명에게 텐트와 난로를 포함한 난방 비상 숙소를 제공했고, 수색·구조 전문가를 파견했다. 유엔의 비상대응기금에도 다각적으로 기여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양국의 지원이 튀르키예를 움직이긴 어려울 것으로 전망했다. 파울 레빈 스톡홀름대 교수는 “튀르키예 대통령은 대선에서 수세에 몰릴수록 스웨덴을 더욱 악마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핀란드 정치인 오잔 야나르는 “전례없는 위기로 분노한 튀르키예 대중은, 정부가 지진이 아닌 나토에 대한 얘기를 꺼내면 비판할 것”이라며 나토 가입 비준이 쉽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 AP=연합뉴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 AP=연합뉴스

229시간 만에 기적 생환

이날 튀르키예와 시리아의 지진 사망자는 4만1000명을 넘어섰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유럽에서 100년 내 발생한 최악의 자연재해로 평가했다. 지진 발생 229시간 만인 15일 오후 5시엔 남부 하타이주 수색 현장에서 13세 소년 무스타파가 구조됐다. 한 시간 전인 오후 4시엔 하타이주 안타키아의 건물 잔해에서 어린 남매 2명과 어머니 엘라가 구조됐다.

튀르키예 남부 안타키아에서 붕괴된 건물 잔해 사이에서 생존자들이 가족의 구조를 기다리며 모닥불을 쬐고 있다. AP=연합뉴스

튀르키예 남부 안타키아에서 붕괴된 건물 잔해 사이에서 생존자들이 가족의 구조를 기다리며 모닥불을 쬐고 있다. AP=연합뉴스

튀르키예 당국은 소셜미디어에 지진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는 거짓 게시물을 올린 78명을 체포하는 등 비판 여론 단속에 나섰다. 또 지진 피해 기부금을 빼돌리기 위해 만들어진 피싱 사이트 46곳을 폐쇄하고 공식기관을 사칭한 소셜미디어 계정 15개를 차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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