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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철 중국산 김치의 大습격

중앙일보

입력

▶김장철 배추 가격이 전년보다 30% 이상 하락한 가운데 지난 15일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에서 배추 경매가 이뤄지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배추 경작 비용이 포기당 200원꼴인데 밭에서 팔리는 가격이 250원, 280원입니다. 한 포기 팔면 겨우 50~80원 건지는 셈이죠. 한 해 농작물을 갈아엎는 심정이 얼마나 참담한지는 농사짓는 사람이 아니면 모를 겁니다.”

땅끝 마을인 전남 해남에서 3000평의 밭에 배추 농사를 짓는 김민수(44)씨는 16일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해남은 올해 배추값 폭락으로 2000ha의 배추·무를 폐기했다. 김씨는 지난해 포기당 700원 받던 배추를 올해는 250원에 팔았다. 3배 정도 수입이 감소한 셈이다.

전남 나주시 남평읍 풍림 삼구는 배추 단지로 유명한 지역이다. 이곳에서도 올해 배추 재배 면적 1만5000~1만6000평 중 80~90%에 해당하는 1만3000여 평의 배추밭을 갈아엎었다. 이 지역 2000평에 배추 농사를 짓고 있는 유상선(60)씨는 “올해 배추값 폭락은 생산량이 늘어난 탓도 있지만 밭떼기로 사가는 중간상인들의 거래가 부쩍 줄어든 이유가 크다”고 말했다.

유씨는 “지난해 200평당 140만원 수익을 올렸지만 올해는 200평당 얻은 수익이 30만원뿐”이라며 “농사꾼들은 1년 농사 지어 한 해를 먹고 사는데 올해는 자식들에게 보낼 학비도 빚을 내야 할 판이라 마음이 무겁다”고 푸념했다.

전국농민총연합의 전북도 연맹은 11월 5일 기준으로 배추 5t 값은 평년 235만원에서 크게 떨어진 143만원, 무 가격은 평년 296만원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129만원이라고 밝혔다. 한국물가정보원에 따르면 17일 기준 소비자 가격이 배추는 포기당 2500원, 무는 개당 1000원으로 지난해에 비해 1000 ~1500원가량 떨어졌다.

도매 가격도 마찬가지다.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에 따르면 15일 기준으로 배추는 10kg당 2550원으로 지난해 3747원보다 30% 이상 하락했고, 무는 10kg당 3900원으로 지난해 8589원보다 55% 하락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농림부는 가격 안정을 위해 농협·농가 계약 재배 물량 등 2400ha의 농산물을 폐기하기로 결정했다. 전체 김장용 무·배추의 8.2% 규모다.

배추는 특성상 수급량 변화에 따라 가격 폭이 크게 달라진다. 공급량이 부족할 경우 가격은 크게 오르지만 반대로 양이 늘거나 소비가 감소하면 순식간에 폭락한다. 올해는 지난해 배추·무 값이 폭등하면서 농민들이 재배 면적을 늘린 데다 태풍 피해가 적어 생산량이 늘면서 가격 폭락을 가져온 것이다.

배추밭 갈아엎는 농가 속출

배추 농가들의 한숨이 깊어지는 이유는 또 있다. 저가의 중국산 김치 수입 증가 때문이다. 중국산 김치의 기생충 파동을 겪은 지 1년이 지났지만 수입량은 전년에 비해 오히려 늘고 있다. 대신 국내 배추의 소비는 점점 줄어들면서 농가들이 이중고를 겪고 있는 것이다.

중국산 김치 수입은 파동 시점인 지난해 11월 일시적 감소 기미를 보이다 수입량이 점점 증가해 올해 10월 말 기준으로 총 14만7261t이 수입됐다. 전년 동기 대비 54%가 증가한 수치다. 월 평균 2만t가량이 수입되고 있는 셈이다. 이 추세라면 연말까지 총 18만t가량이 수입될 것으로 예측된다. 18만t이면 배추로 환산하면 30만t에 달한다.(배추를 1로 보면 김치는 0.6임).

지난해 농림부 발표에 따르면 국내 배추 생산량은 약 230만t이었다. 이 중 35%가 산지 폐기되거나 작물 훼손으로 출하하지 못해 소비자에게 유통된 건 150만t 정도였다. 중국산 김치 30만t이면 국내 실제 배추 소비량 150만t 중 20%를 차지하는 셈이다.

▶인천세관 직원들이 중국산 수입 김치에 대한 통관 작업을 하고 있다.

농산물 유통업계 관계자는 “농산물 20%는 단순한 물량이 아니다. 농산물은 10~20%만 수요가 늘거나 줄어도 가격 영향을 크게 받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국내 유통 직전까지 중국산 김치 수입단가는 10kg 기준 최하 7000~9000원대이고 올해 9월 평균은 8000원대였다. 인터넷 직거래 가격은 10kg당 8000~1만원대에 거래된다. 국내 대기업 가공업체의 김치 가격이 4만~5만원, 중소기업은 3만원대에 거래되므로 중국산 김치가 국산 김치에 비해 4~5배 싼 셈이다. 요즘처럼 경제가 어려운 때 소비자들(주로 음식업자들) 입장에선 싼값의 중국산 김치에 손이 갈 수밖에 없다.

올해는 김치 종주국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사상 첫 무역 역조도 발생했다. 농수산물유통공사에 따르면 올 상반기 국내산 김치 수출액은 3359만3000달러인 데 비해 수입은 4028만9000달러를 기록해 669만6000달러 적자를 기록했다.

9월 말 기준으론 수출액 5244만 달러, 수입액은 6333만 달러로 적자폭은 상반기보다 더 커진 1098만 달러에 달한다. 물량만으로 보면 2004년부터 수입이 수출을 앞섰으나 적자는 올해가 처음인 셈이다. 기생충 파동 여파 불똥이 국산 김치까지 튀면서 수출 여건이 악화된 반면,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 저가의 중국산 김치 수입은 꾸준히 늘고 있기 때문이다.

김치절임식품가공협동조합 조사에 따르면 국내 가공 김치 생산량은 2003년 37만7000t에서 2005년 35만t으로 줄어 눈에 띄게 감소하고 있다. 2004년 600여 개에 달했던 국내 김치 제조업체는 2005년엔 500여 개로 감소했다. 값싼 중국산 김치의 난립으로 우리 김치를 적정 가격에 공급받기 어려워 국내 김치 시장은 갈수록 줄어들 수밖에 없다.

배추 농가의 감소는 김치 재료로 쓰이는 무·배추뿐 아니라 마늘·생강·당근 등의 황폐화라는 악순환 고리로 연결된다. 김치 수입 증가에 따른 국내 배추 공급 과잉으로 시세가 하락하면 다음해 농가는 다른 작목을 생산해 동반 폭락을 낳는 것이다. 지난해의 감자·당근 폭락, 올해 하절기 대파 면적이 20% 이상 증가한 것도 전환 작목 가격 폭락으로 이어지는 도미노식 생산 기반 붕괴에 원인이 있다.

“김치 원산지 표시제 도입해야”

중국산 김치의 무분별한 수입 증가 원인으론 국내 검역 시스템의 허점도 꼽을 수 있다. 기생충 파동 이후 수입식품에 대한 위생 및 검역 시스템 개선 요구가 거셌으나 국내 검역은 정밀 검사 증가, 검사 항목 추가 등 일부만 강화했을 뿐이다.

선진국의 경우 검역관을 현지 농장에 파견해 토질, 사용 시비, 잔류 농약, 일조량, 농업 용수 수질 등 모든 재배 과정을 조사한다. 가공식품의 경우는 공장의 모든 생산 공정과 위생 상태까지 점검하지만 국내의 경우 인력 부족 등을 이유로 세밀한 조사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국립검역소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자.

“1998년부터 모든 식품의 정보가 전산화돼 검역 절차 시스템만 비교하면 미국·일본 등과 비교해 별로 뒤질 것이 없다. 하지만 모든 식품 검역 기관이 일원화돼 있는 선진국에 비해 국내는 식품의 종류에 따라 식약청·관세청·국립식물검역소·국립수의과학검역원 등 여러 기관으로 나뉘어 통관 시간이 오래 걸리고 추가 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

현재 국회는 국무총리 산하에 식품안전 관리 업무를 통합 관장하는 ‘식품안전처’ 신설을 추진 중이다. 농민과 소비자들은 김치 수입 감소를 위한 방안으로 원산지 표시제도에도 기대를 걸고 있다. 이 제도는 한나라당 이상배 의원 등이 지난해 10월 14일 관련 법률을 발의했으나 계류 중이다.

이 의원 측은 “가장 큰 걸림돌은 음식점들의 반발”이라며 “정부와 음식중앙회 같은 곳에서 반대가 심해 비슷한 법안을 발의한 다른 국회의원들과 함께 올해 정기 국회가 끝나기 전 통과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농림부 관계자는 “농민을 위해서는 법률안이 통과되기를 바라지만 시행의 주체는 보건복지부 식품정책팀 소관이라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어렵다”며 “김치의 경우 재료 상태가 아닌 김치를 담근 상태에서 수입하기 때문에 재료 하나하나의 원산지를 표기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 역시 김치의 원산지 표기에 대해 간단치 않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보건복지부 최기호 사무관은 “음식점들의 반발은 부차적 문제다. 식육과 쌀은 원산지 표시의 시급성과 타당성이 존재하지만 김치는 원산지 표시의 실효성과 타당성에 논란의 여지가 있다” 며 “김치는 양념과 재료가 너무 많아 도대체 그 재료 중 어떤 것이 국산이고 수입인지조차 판단하기 힘들다. 또 원산지를 허위로 표시하거나 미표시했을 때 검증 방법이 현재 시스템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원산지 표시에 대해 반발하고 있는 음식점중앙회의 생각은 어떨까? “소비자의 알 권리가 있어야 한다는 건 충분히 인정하지만 제도가 과연 실효성이 있는지가 의문이다. 명확한 원산지 판별 시스템을 갖추지 않고 형식적으로 제도만 만들어 놓으면 그 법을 지키지 않는 음식업자들만 범법자로 몰릴 가능성이 있다.

음식업자들도 수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인데 애국심에 호소하며 무조건 가격이 싼 중국산 김치를 쓰지 말라고 강제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어차피 선택은 개별 영업자들의 몫이다.”

제도 시행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국내 김치 소비를 늘리기 위해선 국민이 성숙한 소비문화를 갖춰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농수산물유통공사에 따르면 배추가 금치로 불려 소비가 줄었던 지난해 김장철엔 4인 가족이 겨우내 먹으려고 담근 김치 비용은 배추 10포기 기준 6만9000원으로 한 가정의 한끼 외식 비용에 불과했다.

올해는 5만4500원 수준으로 더 낮아졌다. 여기에 핵가족화와 여성의 사회 참여, 인스턴트 식품 증가 등으로 김치를 직접 담가먹는 가정이 줄면서 지금은 김장철의 의미가 무색해지고 있다.

결국 저가의 중국산 김치 수입으로 인한 배추 가격 폭락으로 손해를 보는 건 농가나 소비자 양쪽 모두다. 농가는 적자의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소비자는 김치 가공 업체들의 출혈 경쟁으로 질 좋은 재료의 김치를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정수 (주)대아청과 대표

“김치는 싸야 하는가”

매일 밤 11시면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 도매 시장의 경매가 시작된다. 올해 배추값 폭락 현실은 도매시장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났다. 수학능력시험을 하루 앞둔 15일 밤 배추 3통의 경매 낙찰가격은 1200원에서 시작해 품질 좋은 배추는 2700원까지 팔렸다. 지난해 배추 3통의 경매 가격은 2500~3000원이었다.

1985년부터 가락동에서 도매유통업을 하고 있는 ㈜대아청과의 이정수(50) 대표는 배추 농가의 절박한 심정에 공감했다.

“기온 변화와 풍작으로 인한 수확량 증감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무분별한 중국산 김치 수입과 소비자 의식은 맘만 먹으면 바꿀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김치는 우리가 가장 즐겨 먹는 식품임에도 너무 흔해 무조건 싸야 한다는 편견이 있어요. 배추 가격이 조금만 올라도 ‘금치’라고 호들갑을 떨어 당장 소비를 줄이거나 값싼 중국산 김치로 대체하는 우리 국민의 소비 행태가 김치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이 대표는 “국내 배추 농가를 살리고 소비자들도 안심하고 먹거리를 먹을 수 있기 위해선 중국 김치 소비가 많은 음식점부터 솔선수범해 원산지 표시에 앞장서야 한다”고 말했다.

박미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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