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財界도 달라져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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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경제인연합회는 지난달 30일 회장단이 모여 "정치자금 제도를 개혁하지 않으면 제공 요구에 일절 응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일반 사람들은 물론이고, 많은 기업인조차 시큰둥한 반응이다. 중견 K기업의 한 임원은 "그동안 각종 비자금 사건이 터질 때마다 '반성' '거부'를 되뇌었지만 불법 정치자금이 과연 없어졌느냐"고 반문했다.

1990년대 이후 1, 2차 수서사건이나 정권 교체기마다 불거진 불법 대선.총선자금 스캔들 때마다 재계는 자정(自淨)선언을 되풀이했다. 95년 12월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 때에는 '공정 경쟁을 위한 실천 방안'이란 이름으로, 지난해 2월 연례 총회 때에는 "법에 의하지 않은 정치자금을 내지 않겠다"는 결의문을 채택하기도 했다. 하지만 올 들어 터진 SK 비자금 사건, 그리고 여타 대기업으로 번지는 대선자금 파문은 이를 무색하게 하고 있다.

물론 억울한 측면도 있을 것이다. 정치권에 밉보이면 사업하기 힘든 풍토, 뿌리 깊은 정경 유착의 전통, 시도 때도 없이 손을 벌리는 정치인 등….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돈 주고 뺨 맞는'악순환을 되풀이할 것인가.

한 재계 원로는 "싸고 좋은 제품을 만들어 승부하기보다 정치 권력에 빌붙어 이권을 챙기려는 사이비 기업인들이 있는 한 백약이 무효"라며 "분식회계.탈세 등 스스로 약점을 만드는 관행을 근절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성명이나 결의 대신 실천을 해야 하고, 그 출발은 원론적이긴 하지만 '깨끗한 기업'을 하는 데 있다고 본다. 지금도 수많은 기업이 정치자금이나 비자금과는 무관하게 기업을 잘 운영하고 있지 않은가.

홍승일 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