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EC 정상회의서 드러난 한반도 주변 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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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참석한 미국과 일본의 정상이 양국 정상회담에서 끈끈한 관계를 과시하는 가운데 중국과 일본 정상도 최근의 해빙 무드를 재확인했다. 이런 가운데 한국은 한.일 정상회담 뒤의 양국 발표에선 역사 문제와 관련한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을 놓고 혼선이 빚어지는 등 파열음을 냈다. 미국.일본.중국의 활발한 정상 외교를 통한 관계 강화로 한반도 주변 동북아의 외교 지형도가 변해가는 가운데 자칫 한국만 소외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자아내는 상황이다.

아베, 부시와 친밀 과시

◆ 여전히 끈끈한 미국과 일본=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국제회의 데뷔 무대가 된 이번 APEC 정상회의에서 미국과 일본은 또 한번 찰떡궁합을 대내외에 과시했다.

18일 열린 미.일 정상회담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부시 대통령은 아베 총리와 식사를 겸한 회담을 마련했다. 부시가 식사 겸 회담 형식을 취한 것은 호주의 존 하워드 총리와 아베 두 사람 뿐이다. 아베 총리는 일부러 약속시간 20분 전에 도착했다. 그러자 부시 대통령은 "내 방으로 초대하겠다"며 예정에 없던 단독회담을 자신의 방에서 30분간 했다.

이어 식사를 겸한 회담에서도 두 사람은 호흡이 척척 맞았다. 부시가 일본인 프로야구 투수인 마쓰자카 다이스케(松坂大輔)가 내년부터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에 이적하는 대가로 60억 엔을 받게 된 사실을 상기시키며 "일 경제에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농담을 던지자 아베는 "(부시 대통령이 옛 구단주였던) 텍사스 레인저스가 아니라 유감"이라고 화답했다.

아베 총리는 또 1957년 자신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부시 대통령의 조부인 프레스코트 부시 당시 상원의원과 골프를 치며 찍었던 사진을 대형 액자로 만들어 선물했다. 두 정치 명문가의 인연을 은연중에 강조한 것이다.

이에 부시는 "아베 총리는 강력한 지도력 아래 (한국.중국 방문 등 아시아 외교에서) 멋진 스타트를 끊었다. 그의 지성을 칭찬하고 싶다" "그의 스타일은 느낌이 좋으며 안심하고 협력할 수 있다"며 한껏 치켜세웠다. 일 언론들은 "첫 정상회담이었지만 두 사람은 마치 오래된 친구 같았다"고 전했다.

노 대통령, 과거사에 집착

◆ 과거사 관련 노 대통령 발언 발표 둘러싸곤 혼선=그러나 한.일 정상회담을 둘러싸고는 혼선이 빚어졌다. 노무현 대통령이 "역사 문제가 더 이상 동북아시아 협력에 관한 장애요인이 되지 않도록 아베 총리는 지도력을 발휘해 달라"고 말했다고 한국 정부는 밝혔지만, 일 정부의 발표에는 이 부분이 전혀 없었다.

후진타오, 내년 방일 확정

◆ 후진타오 방일 확정=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이 내년 초 일본을 공식 방문한다. 중국 최고지도자로는 98년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의 방일 이후 9년 만이다.

19일 홍콩의 사우스 차이나 모닝포스트지에 따르면 후 주석은 18일 하노이에서 열리고 있는 APEC 정상회의에서 아베 총리와 만나 일본 측의 방문 요청을 수락했다.

회담에 참석한 양국 관리들은 두 정상이 시종일관 화기애애하게 대화했으며 후 주석이 방문 요청을 수락함에 따라 양국 실무진이 곧바로 방문 시기와 방식에 대한 구체적인 협의를 벌였다. 류젠차오(劉建超)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두 지도자가 매우 중요한 합의를 이뤘고, 이는 상호 관계개선을 위한 좋은 계기"라고 논평했다. 후 주석과 아베 총리는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후 주석의 방일은 아베 총리의 지난달 중국 방문에 대한 답방 형식이다. 그러나 그동안 냉각됐던 두 나라 관계를 생각하면 중국과 일본이 본격적인 해빙관계에 접어들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중.일 정상은 이날 회담에서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해 다각적인 협력을 하기로 합의했다. 양국 무역.환경 분야의 협력도 확대하고, 양국 국민이 역사인식의 차를 좁히기 위해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한다는 데도 합의했다. 특히 후 주석은 아베 총리에게 (북한의 핵실험 이후) 일본이 자체 핵무장을 할 의도가 있는지에 대해 물었고, 이에 대해 아베 총리는 "일본의 핵무기 비보유는 오랫동안 견지해온 정책"이라고 화답했다.

한편 부시 대통령과 후진타오 주석은 19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북핵 문제 해법과 통상 현안 등을 의제로 양국 정상회담을 했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홍콩=최형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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