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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와 메두사가 통하는 이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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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3호 20면

시선의 불평등

시선의 불평등

시선의 불평등
캐서린 매코맥 지음
하지은 옮김
아트북스

비너스는 흔히 아름다운 여성의 대명사처럼 여겨지지만, 벌거벗은 여성의 몸을 비너스로 표현한 유명한 그림들이 마냥 찬탄만 부르는 건 아니다. 일례로, 20세기 초 영국의 여성참정권 운동가 메리 리처드슨은 런던 내셔널갤러리에 식칼을 숨기고 들어가 벨라스케스의 비너스 그림을 난도질했다.

경찰에 붙잡힌 그는 서면 진술서에 이렇게 밝혔다고 한다. “근대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물 팽크허스트를 죽이려는 정부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신화의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 그림을 파괴하려고 한 것입니다.” 당시 에밀리 팽크허스트를 비롯한 여성참정권 운동가들이 감옥에서 무자비한 처우를 당하고 있는 것을 두고 한 말이다.

벨라스케스가 그린 비너스(부분). 여성참정권 운동가 리처드슨이 캔버스를 식칼로 난자한 뒤 언론에 보도된 사진으로, 그림 속 여성의 몸에 흔적이 뚜렷이 보인다. [사진 아트북스]

벨라스케스가 그린 비너스(부분). 여성참정권 운동가 리처드슨이 캔버스를 식칼로 난자한 뒤 언론에 보도된 사진으로, 그림 속 여성의 몸에 흔적이 뚜렷이 보인다. [사진 아트북스]

이 그림을 이 책 『시선의 불평등』(원제 Women in the Pictrure)이 언급하는 이유는 이런 사건 때문만은 아니다. 영국의 미술사학자이자 작가, 큐레이터인 저자에 따르면 고전적인 남성 누드가 힘과 영웅주의를 상징한 반면 비너스 같은 누드 그림 속 여성은 ‘보여지는’ 존재, 특히 백인 남성의 시선에서 성적인 대상으로 표현되곤 했다. 저자는 회화의 역사에 대해 존 버거가 했던 말을 인용한다. “남자들은 행동하고 여자들은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흔히 얘기하는 대로 시선은 일종의 권력이건만, 이 책은 예로 드는 서양미술사의 이름난 작품들 속 여성은 ‘보는’ 주체로서 권력에서 배제돼 있다.

이 책은 비너스, 성모상과 어머니, 처녀, 괴물 등 크게 네 가지 이미지이자 주제로 각 장을 구성했다. 저자는 회화와 조각 작품을 사례로 그 시선이나 포즈, 표현방식, 작품에 담긴 이야기 등을 통해 여성의 신체를 대상화·신비화하고, 젊은 여성의 고통과 죽음을 이상화하고, 여성에 대한 두려움을 괴물로 투사하는 등의 면면을 비판한다.

우리의 첫 미술사 수업

우리의 첫 미술사 수업

우리의 첫 미술사 수업
강은주 지음
이봄

이런 이미지들이 서양문화에서 차지하는 강력한 함의는 현대의 대중문화나 미디어에서도 종종 차용되고 변용되는 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책에는 비욘세의 뮤직비디오,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 시위 당시 미국 잡지 타임이 만든 표지, 네슬레 유아식 광고, 엉덩이를 한껏 강조한 킴 카디시안의 잡지 표지 사진 등 서양미술사의 기존 이미지와 연결되는 다양한 사례가 언급된다.

2016년 미국 대선 때는 힐러리 클린턴을 메두사에, 도널드 트럼프를 메두사의 목을 벤 페르세우스에 대입한 이미지가 널리 퍼지기도 했다. 책에 따르면, 여성을 괴물화한 배경에는 대개 남성의 성적 두려움과 관련된 신화나 이야기가 담겨있다. 괴물의 예로는 메두사나 마녀만 아니라 아담의 첫 번째 아내 릴리스, 이집트 신화에서는 양성적 존재이지만 그리스 신화에서는 사약한 여성 야수로 나오는 스핑크스도 있다.

한편으로 저자는 근현대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이와 대비시키며 여성을 대상화하지 않는 시선이 어떤 것인지를 헤아리게 한다. 또 출산과 육아와 가사노동을 일과 병행하면서 자신이 겪고 느낀 것과 함께 여성의 실제 일상이나 생리적 특징을 신비화하지 않고 표현한 현대 미술가들의 작업도 소개한다. 여성을 신비화·이상화하는 시각은 현대에도 할리우드 스타의 체모 노출이 논란이 되거나, 옷과 침구에 생리혈이 묻은 채 잠자는 모습을 담은 예술가의 사진이 인스타그램에서 삭제당하는 사건 등에서 환기된다.

미켈란젤로의 ‘낙원 추방’. 저자에 따르면, 가운데 나무를 뱀처럼 휘감은 근육질 괴물이 아담의 첫 번째 아내 릴리스. [사진 아트북스]

미켈란젤로의 ‘낙원 추방’. 저자에 따르면, 가운데 나무를 뱀처럼 휘감은 근육질 괴물이 아담의 첫 번째 아내 릴리스. [사진 아트북스]

저자는 책 전반에서 남성 중심, 백인 중심의 시선을 전투적으로 비판하는데, 사안마다 비판적인 어조일망정 자신과 다른 주장과 시각도 간과하지 않는다. 덕분에 신화 등을 빌려 성폭력을 묘사한 옛 그림이나 조각을 지금 시대 어떤 방식으로 전시할 것인지, 여성 스스로 기존 서양미술사의 이미지를 재현한 새로운 작품을 어떻게 볼 것인지 등 여러 이슈의 논쟁적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

아쉬운 것은 책에 실린 작품 사진이 제한적이라는 점. 서구 미술사와 대중문화에 해박하지 않은 독자로서는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책에 언급된 작품들을 인터넷 등에서 따로 찾아보는 수고가 필요해 보인다.

이와 비교해 『우리의 첫 미술사 수업』은 서양미술사의 초심자라도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19세기 이전까지의 서양미술사를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입문서 성격인데, 저자가 대학에서 10년간 교양과목으로 강의한 ‘여성과 예술’의 내용을 구어체로 풀어썼다. 그동안 가려졌던 여성 작가와 작품, 이미지에 담긴 젠더 이데올로기, 이브와 성모 마리아, 행복한 어머니상 등 각 장의 주제와 구체적으로 언급되는 작품들은  『시선의 불평등』과도 중첩되는 부분이 많다. 무엇보다도 돋보이는 것은 풍부한 사진. 본문에 중요하게 언급된 작품 사진을 거의 빠짐없이 실어 놓았다.

이 책에 따르면, 현대미술에서 여러 여성이 창작자로 맹활약하는 데도 불구하고 기존의 서양미술사, 예컨대 가장 유명한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나 잰슨의 『미술의 역사』 초판본에는 여성 미술가가 한 명도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서양미술사 전체에서 여성 미술가에 대한 자리매김이 대두한 맥락 역시 책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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