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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병제에서 모병제로, 미국 경제학자가 논쟁 주도한 이유[BOOK]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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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의 시대

빈야민 애펠바움 지음
김진원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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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후반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 빠져 있었다. 공화당 대선 후보인 리처드 닉슨은 징병제 폐지와 모병제 도입을 공약으로 당선했다. 그는 69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하자 모병제 추진 자문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런데 위원회 논의를 주도한 건 정치인이나 군인보다는 경제학자들이었다.

경제학자들의 논리는 이랬다. 모병제를 하면 정부가 군인들에게 지급할 인건비가 증가한다. 하지만 사회적 비용은 오히려 감소한다. 징병제였으면 입대했을 청년들이 다른 분야에서 경제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비용과 편익을 함께 따지면 사회적 편익이 더 크다는 주장이다. 시카고대 경제학 박사인 월터 오이의 논문이 핵심 근거였다.

1980년 미국 PBS의 TV 프로그램 '선택할 자유'에 출연한 밀턴 프리드먼의 모습. [사진 부키]

1980년 미국 PBS의 TV 프로그램 '선택할 자유'에 출연한 밀턴 프리드먼의 모습. [사진 부키]

당시 육군 참모총장인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와 시카고대 교수였던 밀턴 프리드먼의 논쟁이 인상적이다. 웨스트모어랜드가 모병제 직업군인을 ‘용병’이라고 깎아내리자 프리드먼이 응수했다. “같은 의미에서 저도 용병 교수입니다. 머리가 길면 용병 이발사가 깎고 몸이 아프면 용병 의사가 치료합니다. 당신도 용병 장군입니다.” 결국 논쟁에서 이긴 건 경제학자들이었다. 프리드먼은 69년 타임지 표지 인물에 오르고 76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뉴욕타임스 경제 담당 논설위원인 저자는 이 무렵 미국에서 ‘경제학자의 시대’가 열렸다고 본다. 병역 문제 같은 공공정책에서 경제학자의 영향력이 급속히 커졌다는 의미다. 공공정책을 추진할 때 ‘비용·편익 분석’ 같은 경제학 개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 배경에는 ‘자유시장은 효율적’이란 믿음이 있었다. 90년대 초반 소련이 붕괴하면서 자유시장에 대한 믿음은 더욱 강해졌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충격을 받기 전까지 경제학자의 시대는 굳건하게 이어졌다.

저자는 자유시장과 효율을 추구하는 경제학자의 노력이 경제성장을 가져왔다는 걸 부정하지 않는다. 동시에 불평등의 골을 깊게 해 수많은 불운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줬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불평등이 심화한다는 사실은 미국이 거둔 경제성과가 보기만큼 건강하지 않음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이어 “튼튼한 사회 안전망이 시장경제를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것처럼 시장경제는 튼튼한 사회 안전망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분배(사회보장)와 성장이 같이 가야 한다는 얘기다.

한국과 대만, 모범 사례로 꼽는 이유

특이하게도 저자는 한국과 대만을 모범 사례로 꼽는다. 밤에 찍은 한반도 위성사진을 보면 남쪽은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고 북쪽은 어두컴컴하다. 이걸 자유시장의 승리로 해석하는 건 잘못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러면서 “한국은 경제를 신중하게 조종하면서 번영을 일궈냈다”고 말한다. 자유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지 않고 국가가 일정한 역할을 했던 게 한국의 성공 비결이란 주장이다.

특히 토지개혁이 경제성장의 중요한 발판이 됐다고 본다. 저자는 “20세기를 돌이켜 보면 빈곤에서 번영으로 도약한 나라와 그에 미치지 못한 나라 사이에서 중요한 차이점은 토지 소유권의 분배(토지개혁)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이어 “태국이나 말레이시아, 라틴 아메리카(중남미) 여러 나라처럼 대지주의 토지 소유를 그대로 남겨 놓은 나라는 그(한국·일본·대만)에 맞먹는 성장을 일궈 내지 못했다”고 본다.

이 책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시절인 2019년 미국에서 출간했다. 저자는 뉴욕타임스 워싱턴지국에서 연방준비제도(Fed) 등 경제정책 담당 기자로 10년가량 근무했다. 그래서인지 미국 정·관계 등에 대한 꼼꼼한 취재와 자료 수집 능력이 돋보인다. 다만 미국 내부 사정에 익숙지 않은 한국 독자에게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시대적·공간적 배경을 왔다 갔다 하면서 다양한 일화를 소개하는 점이 어떤 독자들에겐 혼란스러울 수도 있겠다. 원제 The Economists' H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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