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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장관에 손가락질까지…시진핑 사단 아닌데 총애받는 왕이 [후후월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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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후월드]는 세계적 이슈가 되는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을 파헤쳐 보는 중앙일보 국제팀의 온라인 연재물입니다.

시진핑 3기 정치국 해부 ② 왕이 중앙외사위원회판공실 주임

지난 2016년 8월 중국 시사 주간지 『환구인물』 표지 인물에 선정된 왕이 중국 외교부장. “왕이는 왜 이렇게 인기인가”라는 커버스토리 기사가 실렸다. 환구인물 캡처

지난 2016년 8월 중국 시사 주간지 『환구인물』 표지 인물에 선정된 왕이 중국 외교부장. “왕이는 왜 이렇게 인기인가”라는 커버스토리 기사가 실렸다. 환구인물 캡처

왕이(王毅·69) 중국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이 당 중앙정치국 위원 취임 후 처음으로 7800자 장문의 기고문을 8일 인민일보에 게재했다. 중국 외교의 간판으로 실무를 10년간 맡은 뒤 전략가로 변신을 앞두고 향후 5년 이상 펼쳐질 중국 외교 전략을 담았다. 공개 날짜도 미국의 중간선거일에 맞췄다. 왕이 정치국 위원은 내년 3월 양회에서 외교부장 직함을 후임자에게 건넨 뒤 양제츠(楊潔篪·72)의 바통을 이어 정부 직함 없이 당의 중공중앙 외사위원회 판공실 주임만 맡을 전망이다.

8일자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6면에 게재된 왕이 중앙정치국 위원의 기고문 ‘중국 특색 대국외교의 전면 추진’. 향후 5년 이상 중국 외교의 총 방향을 담았다. 인민일보 캡처

8일자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6면에 게재된 왕이 중앙정치국 위원의 기고문 ‘중국 특색 대국외교의 전면 추진’. 향후 5년 이상 중국 외교의 총 방향을 담았다. 인민일보 캡처

시진핑 3기 정치국 세 번째 연장자

왕 위원은 이번 20기 정치국원 24명 가운데 세 번째로 나이가 많다. 1950년 7월생 장유샤(張又俠)와 1953년 6월생인 시진핑(習近平) 다음으로 1953년 10월 베이징에서 태어났다. 68세 이상은 은퇴하는 칠상팔하 잠규칙(潛規則)이 깨진 지난달 20차 당 대회에서 생환은 물론 ‘당과 국가 영도인’으로 불리는 정치국에 오르는 입국(入局)에도 성공했다. 시진핑 주석과 개인적 관계가 없어 시자쥔(習家軍·시진핑 사단)으로 분류되지 않지만 왕 위원의 입국은 이미 예견됐다. 당 대회 폐막 후 관영 신화사가 수뇌부 인사기준으로 밝힌 ‘과감하게 투쟁하고(敢于鬪爭·감우투쟁), 투쟁을 잘하는(善于鬪爭·선우투쟁)’ 능력을 제시한 만큼 그의 전랑(戰狼·늑대전사) 외교 스타일을 시 주석이 높이 평가했다는 의미다.

왕 위원은 8일 ‘중국 특색의 분쟁 해결’이라는 레토릭을 말했다. 지난 10년간 공평정의를 촉진했다는 부분에서 “사정 자체의 옳고 그름에 비추어 입장을 결정하고, 중국 특색 분쟁해결의 길(道)을 제출·시행하며, 이란 핵·한반도 핵·아프가니스탄·중동 등 핫이슈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견지했다”고 했다. 미국 등 서방과 협력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중국 방식을 내세워 경합한 것을 ‘중국 특색의 분쟁 해결’로 표현했다.

‘중국 특색 분쟁해결’ 레토릭 만들어

‘중국 특색 분쟁해결’은 지난 2015년 전인대 외교부장 기자회견서 처음 등장했다. 당시 왕 부장은 “광범하고 심오한 중의학의 도(道)와 같이 핫이슈를 대할 때 우선 맥을 잘 짚고, 한쪽 말만 곧이듣거나 어지럽게 약을 처방하지 않고, 문제의 원인을 찾아 바른 약을 처방하고 뿌리에서 흙을 제거, 병이 재발하지 못 하게 한다”고 말했다. 중국 의학을 외교에 접목한 셈이다. 이후 왕 부장은 2017년 국제정세와 중국 외교 세미나 개막식, 지난 9월 유엔 총회 연설에서도 ‘중국 특색의 분쟁 해결’을 말했다.

‘중국 특색 대국 외교의 전면 추진’이란 제목의 7800자 기고문에서 왕 위원은 이른바 ‘시진핑 외교 사상’을 전폭 찬양했다. 그는 “선진적인 사상이 비범한 사업을 빛나게 하며, 과학적 이론이 위대한 실천을 인도한다”면서 “당대 중국의 마르크스주의이자 21세기 마르크스주의의 대외 업무 영역에서 최신 이론적 성과”라며 시진핑 주석의 외교 지침을 칭송했다.

향후 중국의 외교 기획을 총괄하는 왕 위원이 기고문에서 미·중 관계에서 안정을 강조한 부분은 주목할 만하다. 왕 위원은 “총체적으로 안정된 대국 관계 프레임을 세웠다”며 “미·중 관계는 상호존중, 평화공존, 협력 공영의 정확한 방향을 가리켰다”고 지난 10년간 양국 관계를 평가했다. 전망에 대해 그는 “대국과의 조율과 긍정적 상호 작용을 촉진하고 평화적으로 공존하고 총체적으로 안정되고 균형적으로 발전하는 대국 관계 구도의 형성을 추진하겠다”면서 당 대회 보고 중 외교 파트를 거듭 피력했다. 조율과 안정, 균형을 강조하며 미국과 직접적 충돌을 피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으로 풀이된다.

 지난 8월 24일 베이징 댜오위타이 국빈관에서 열린 한·중 수교 30주년 기념식에 왕이(왼쪽) 중국 외교부장과 정재호(오른쪽) 주중대사가 동시에 입장하고 있다. 사진=중국 외교부 홈페이지

지난 8월 24일 베이징 댜오위타이 국빈관에서 열린 한·중 수교 30주년 기념식에 왕이(왼쪽) 중국 외교부장과 정재호(오른쪽) 주중대사가 동시에 입장하고 있다. 사진=중국 외교부 홈페이지

문혁 기간 8년간 헤이룽장서 노동

왕 위원은 학창시절을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노동자로 지내야 했다. 1969년 중학 졸업 후 지식 청년의 하방으로 헤이룽장(黑龍江) 북부 러시아 접경 헤이허(黑河)지구의 생산건설병단 병사로 보내졌다. 8년간의 노동자 생활을 거친 뒤 1977년 24살에 대학입학 가오카오(高考) 시험이 부활하자 베이징 제2외국어대 아시아·아프리카어과에 일본어 전공으로 합격했다. 당시 대학에는 25세 이상은 입학할 수 없는 규정이 있어 대입 부활이 1년만 늦춰졌다면 대학 문턱을 영원히 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지난 1981년 베이징 제2외국어대학 재학생 시절의 왕이(왼쪽) 현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위원 겸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 사진=환구인물

지난 1981년 베이징 제2외국어대학 재학생 시절의 왕이(왼쪽) 현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위원 겸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 사진=환구인물

“출발선에 서서 이 순간이 쉽지 않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 1978년 초 배낭을 메고 처음 제2외대 정문을 들어섰을 때 사실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이날은 나에게, 우리 세대에게 무척 중요하고 너무나 힘든 날이었다.” 지난 2004년 출판된 『제2외대 40년』 회고록에 담긴 왕 위원의 문혁에 대한 쓰라린 기억이다.

왕 위원은 문학과 역사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헤이룽장의 집단농장인 베이다황(北大荒)에서 일할 당시 문학과 역사책을 섭렵했으며 현지 신문에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대학 시절 왕 위원은 일본어 전공 논문 2편과 번역 작품 한 편을 발표했다. 그의 논문 한 편은 유명 학술 저널 ‘일어 학습과 연구’에 게재됐다. 해당 저널은 전문 학자의 논문 발표 채널로 게재에 성공한 학부생으로는 왕 위원이 유일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현지인 수준의 그의 일본어 실력은 지난 1983년 주일 중국대사관 근무 시절 일본을 방문한 후야오방(胡耀邦) 당시 총서기의 연설문 작성에서 빛났다. 2004~2007년 주일 대사 시절에는 융빙지려(融冰之旅, 얼음을 깨는 여행)로 불린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의 방일을 수행하며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도 했다.

저우언라이 총애 비서 사위 ‘금거북족’

왕 위원은 중국 정계에 적지 않은 금거북이 클럽의 대표 주자다. 그의 장인은 중국 초대 총리 겸 외교부장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총애한 비서 첸자둥(錢嘉東·98)이었다. 상하이 자오퉁(交通)대 출신으로 신중국 초기 제네바 회담과 중국·인도 국경 담판에 참여한 외교관 첸자둥은 1966년 저우언라이 비서로 임명되면서 저우에게 최고의 비서란 평가를 받았다. 저우 총리 사망후에는 제네바 유엔사무소 대표 등을 역임했다. 고위 관리의 사위를 중국에서는 ‘금거북사위(金龜壻, golden son-in-law)’로 부른다. 당나라 시인 이상은(李商隱, 812~858)의 시 ‘위유(爲有)’에서 유래됐다.

왕이 정치국위원의 동갑내기 부인인 첸웨이(錢韋·69) 여사가 지난해 12월 베이징 댜오위타이(釣魚臺) 국빈관에서 열린 자선 바자에서 연설하고 있다. 사진=중국 외교부 사이트

왕이 정치국위원의 동갑내기 부인인 첸웨이(錢韋·69) 여사가 지난해 12월 베이징 댜오위타이(釣魚臺) 국빈관에서 열린 자선 바자에서 연설하고 있다. 사진=중국 외교부 사이트

왕 위원의 동갑내기 부인인 첸웨이(錢韋·69) 여사는 지난해 12월 18일 중국 외교부 주최로 댜오위타이(釣魚臺) 국빈관에서 열린 자선 바자인 ‘사랑은 국경을 모른다(大愛無國界, Love knows no borders)’ 행사에 참여해 직접 연설을 하기도 했다.

왕 위원은 한반도와도 관계가 깊다. 외교부 부부장(차관)이던 지난 2003년부터 2004년까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베이징에서 개최된 1·2·3차 6자회담의 의장국 중국 대표로 활약했다. 이후 우다웨이(武大偉) 부부장에게 대표직을 넘기고 일본대사에 부임했다.

지난 2016년 8월 24일 왕이(王毅·오른쪽) 중국 외교부장이 윤병세 당시 외교장관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이날 일본 도쿄에서 열린 한·중·일 외교장관회담을 마치고 아베 신조(安培晉三) 당시 일본 총리 공관에서 면담을 앞둔 자리에서다. 중앙포토

지난 2016년 8월 24일 왕이(王毅·오른쪽) 중국 외교부장이 윤병세 당시 외교장관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이날 일본 도쿄에서 열린 한·중·일 외교장관회담을 마치고 아베 신조(安培晉三) 당시 일본 총리 공관에서 면담을 앞둔 자리에서다. 중앙포토

지난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특사단으로 중국 외교부 청사를 방문한 심재권(사진 왼쪽) 당시 민주당 의원 뒤로 왕이 당시 외교부장이 입장하고 있다. 사진=신경진 특파원

지난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특사단으로 중국 외교부 청사를 방문한 심재권(사진 왼쪽) 당시 민주당 의원 뒤로 왕이 당시 외교부장이 입장하고 있다. 사진=신경진 특파원

이후 2016년 초 북한의 핵 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 실험으로 한국이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 체계를 배치하는 과정에서 불거진 갈등과 보복 과정에서 왕 위원은 직설적이고 위협적인 발언으로 한국 국민에게 전형적인 전랑 외교관의 인상을 남겼다. 이제 중국 외교를 막후에서 지휘하는 역할을 맡게 된 왕 위원이 투쟁을 강조하는 시진핑 주석의 외교 노선을 향후 미·중 전략 경쟁과 글로벌 분쟁 해결에서 어떻게 반영할 것인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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