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강화" "변화유도" 이견 팽팽|대북한정책 이대로 좋은가 정부·학계 활발한 논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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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한-소 수교에 이어 중국과도 사실상 외교관계를 수립함에 따라 정부와 학계에서는 향후 대북한 정책의 방향을 둘러싼 논쟁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미·일·소·중등 동북아 4강과 우리와의 사이에 조성된 새로운 역학관계를 어떻게 운용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이룩해 나갈 것인가에 대해 적지 않은 견해차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북한이 스스로 개혁·개방의 길로 들어설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는 보수성향의 인사들은 사실상 국제적인 대북 고립화의 외교정책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소를 통한 경제·군사적 압력을 도모하면서 미·일 등 서방선진국가들의 대북 관계개선을 가급적 억제·차단하고 단독으로라도 유엔에 우선 가입해야 한다는 것 등이다.
따라서 남-북 대화도 적화통일 노선, 하나의 조선정책포기를 요구하거나「자유의 바람」을 불어넣는 교류와 협력을 성사시킨다는 차원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유리한 여건 이용>
섣부른 남북 정상회담은 북한에 불필요한 양보를 필요로 할지 모르고 불가침선언 등을 채택할 경우 모처럼 주어진 대북 압력의 국제적 여건을 스스로 포기하는 셈이 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다시 말해 북한의 루마니아 화 이외에는 남북통일의 가능성이 희박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북한의 국제적 고립과 경제사정의 악화가 매우 필요하다는 논리다.
남북대화에는 응하되 일정한 한계는 지켜 자칫 감상적 통일론에 빠지지 않도록 내부단속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문하기도 한다.
요컨대 지금은 가능한 모든 대북한 압력수단의 고삐를 늦추지 않으면서 북한을 더욱 궁지에 몰아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대북한 정책의 목적은 무조건적인 통일이나 북한의 몰락이 아니라 성공적인 통일이어야 한다며 대북 강경 일변도의 정책에 문제를 제기하는 인사들도 적지 않다.
권력의 세대교체, 경제적 곤란, 탈 이데올로기의 세계적 조류라는 3각 파도에 시달리고 있는 북한은 머지않아 개혁과 개방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보기 때문이다.
특히 모험이 수반되는 변화는 김일성만이 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되기 때문에 우리정부는 김일성을 상대로 적극적인 거래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불가침선언이나 정상회담 등을 통해 정치 군사적 신뢰구축에 인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와이대의 서대숙 교수 같은 이는 심지어 유엔가입도 당분간 보류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한다.
그같은 남-북의 실질적 신뢰관계구축만이 남-북 관계를 한민족공동체의 테두리로 끌어들일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평화정착을 꾀할 수 있게 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직접 화해가 최선>
북한의 안정적 변화를 유도하는 것이 북한의 몰락을 재촉하는 것보다 현실적이라는 이유는 또 있다.
즉 우리의 분단은 국제적 요인 못지 않게 민족내부의 갈등에 연 원하는 부분이 많다는 점이다. 따라서 분단해소의 주안점 역시 남북한의 직접적인 화해에 두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남-북한간의 신뢰구축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북한이 몰락 위기에 처할 때 한반도의 평화는 오히려 매우 위험한 상황에 빠질 우려가 높다는 분석이다.
따라서 독일식 흡수통일이나 북한의 루마니아 화를 기대한다는 것은 환상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전쟁과 같은 불행한 사태가 없더라도 독일식 흡수통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의 경제·정치적인 성숙도는 높지 않다는 것이다.
통일비용을 줄이고 통일 이후의 예견되는 사회·경제적 갈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도 북한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한 경제재건의 지원도 가능한 범위 내에서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남북간의 직접적인 대화와 민족자결의 통일기반조성을 강조하는 또 다른 이유는 현재의 탈냉전적 국제조류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이라는 보장도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 국제적 호기를 무모한 대북 압력에만 이용하려 할 것이 아니라 북한의 개방을 돌이킬 수 없는 기정 사실로 만들어 가는 노력에 연결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7·7선언의 기본정신에 따라 일본뿐만 아니라 미·영·독·불·이 등과도 관계 개선을 이룰 수 있도록 우리가 적극 주선해야 할 것이라는 요구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일본의 일방적인 대북 접근을 결과적으로 허용하게 되고 북한의 경제를 왜곡시킬 가능성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지적이다.
아울러 한반도주변 4강이 진정으로 우리의 통일을 희망한다고 보기 어렵다면 이른바 남북한 교차승인이 주변4강의 대한반도 「분할통치」에 이용되지 않도록 더욱 주체적인 통일기반의 확립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펴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적극적인 대북한 관계개선노력이나 강경 일변도의 정책을 모두 다 비판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외교나 통일정책은 결국 내치의 연장이어야 하며 내적 역량의 성숙 없이 인위적인 노력을 지나치게 강조할 때 많은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것이다.

<성숙한 역량 필요>
예를 들어 동구권과의 수교를 1년만 서두르지 않았어도 우리는 경제원조 등 적지 않은 대가를 치를 필요가 없었다는 지적이다.
그런데도 수교를 서둘렀던 데는 어떤 정치적 의도가 개재되지 않았느냐고 비판하고 있다.
현재 우리의 대북한 정책에는 이 세 가지 흐름이 혼재하고 있다.
우리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이 세 가지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건전한 상식」에 바탕을 두고 있으나 구체적인 사안별로는 저마다 강조점이 달라 혼선을 빚는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유엔문제나 북한·일본의 관계개선 움직임에 대해 어정쩡하고 뭔가 석연치 않은 태도를 엿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따라서 대북한정책의 방향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국민적 합의과정만이 질적 변화를 요구받는 우리의 대북한 정책을 보다 의미 있게 하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재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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