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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파 쥐 먹다 죽은아이도…선감학원 40년 만에 피해자 인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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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도에서 배가 고파 수수 이삭을 주워 먹다가 선생님한테 맞았습니다. 몽둥이에 맞아 눈 옆의 피부가 찢어졌어요. 세 바늘이나 꿰매고 실명할 뻔 했습니다. 배고파서 추수 끝나고 땅에 떨어진 이삭을 먹었는데 그게 큰 죄가 됩니까. 배고픔에 울고, 서러움에 울었습니다.”(선감학원 피해자 김모씨)

 사진은 1970년 선감학원 아동들. 사진 국가인권위원회

사진은 1970년 선감학원 아동들. 사진 국가인권위원회

20일 서울 중구 남산스퀘어빌딩에서 열린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기자회견에서 선감학원 피해자들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담담하게 소회를 털어놓았다. 진실화해위는 이날 “국가 공권력에 의한 중대한 인권침해사건”이라며 “선감학원 수용자 전원은 선감학원 아동 인권침해사건의 피해자로 인정된다”고 밝혔다.

이날 회견에는 정근식 진실화해위원장을 비롯해 김동연 경기지사, 선감학원 피해자 9명이 참석했다. 진실화해위는 지난 18일 제43차 위원회를 열고 이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선감학원 폐원 40년 만이다. 선감학원 피해자 190명은 국가 차원의 사과와 피해회복 대책 마련, 사망자 추모시설 건립 등을 요구하며 2020년 12월 진실화해위에 진상규명을 신청한 바 있다.

피해자만 약 5000명…강제노역, 굶주림 시달려

20일 오전 서울 중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정근식 진실화해위원장이 선감학원 아동 인권침해 사건 진실규명 결정 발표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20일 오전 서울 중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정근식 진실화해위원장이 선감학원 아동 인권침해 사건 진실규명 결정 발표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진실화해위에 따르면 선감학원은 일제가 1942년 경기도 선감도에 설립한 아동 강제수용소로, 해방 후 경기도가 1982년 폐쇄까지 운영했다. ‘부랑아 교화’라는 명분 아래 5000여명이 넘는 원아들이 수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진승 진실화해위 상임위원은 “원아대장으로 확인된 4689건은 최소 숫자라고 보면 되겠다”며 “경기도 자료까지 하면 5300~5400명의 원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진실화해위는 지난달 26일부터 30일까지 5일간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 일대 선감학원 사건 피해자 유해 매장 추정지 시굴을 진행한 결과 5개의 봉분에서 유해 5구, 치아 68개, 단추 6개를 찾아냈다.

선감학원 암매장지로 추정되는 봉분에서 나온 치아와 단추. 2기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제공

선감학원 암매장지로 추정되는 봉분에서 나온 치아와 단추. 2기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제공

선감학원에 수용된 아동들은 열악한 시설 환경 속에서 살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 상임위원은 “아동 숙사 6개동 중 실제 아동들이 쓴 건 2개에서 많을 때 4개였다”며 “공간 활용도는 1인당 0.35평(1.15㎡)으로 아동복리법 상의 0.75평(2.47㎡)에 훨씬 못 미쳤다”고 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18년 발간한 선감학원 아동인권침해사건 보고서의 피해자 증언에 따르면 당시 아동들은 염전 노동, 농사, 축산, 양잠 등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꽁보리밥과 소금, 간장, 젓갈 등이 식사로 나왔으나 이마저도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굶주린 아동들이 열매, 들풀, 곤충, 쥐 등을 먹는 과정에서 불의한 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영양실조로 사망해 암매장된 경우도 있었다. 선감학원은 사망한 아동들을 생존 아동들이 직접 매장하게 한 것으로 알려졌다.

진실화해위는 당시 부랑아 대책을 수립해 무분별한 단속을 주도한 법무부·행정안전부·보건복지부 등 중앙정부 부처와 단속주체였던 경찰, 선감학원을 운영한 경기도 등에 인권유린의 책임이 있다며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공식 사과하라고 권고했다. 아울러 국가가 피해자와 유가족의 피해회복을 위해 관련 특별법을 제정하고 신속한 유해 발굴, 트라우마 치유 프로그램 마련 등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했다.

피해자들 “대통령의 공식 사과 바란다”

선감학원 피해자 A씨의 원아대장. 김남영 기자

선감학원 피해자 A씨의 원아대장. 김남영 기자

피해자들은 보상보다 국가의 진심 어린 사과가 선행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피해자 한모씨는 “이건 이념의 문제가 아닌 아동인권유린사건”이라며 “윤석열 대통령께서 공식적으로 사과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말했다.

이에 정근식 위원장은 “국가의 사과와 관련해서는 곧 관계부처에 권고문을 보내고, 필요하면 직접 관계부처 책임자들을 만나 어떤 방식으로 사과할 것인지 논의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김동연 경기지사는 피해자와 유가족들에게 공식 사과했다. 김 지사는 “관선 도지사 시대에 벌어진 심각한 국가폭력으로 크나큰 고통을 겪은 생존 피해자와 유가족 여러분께 경기도지사로서 깊은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경기도는 피해자 생활 지원을 위해 생활안정지원금 지급을 검토하고, 피해자지원센터를 설치해 피해지원 기능을 체계화한다는 방침이다. 김 지사는 “관련 예산 규모는 정밀하게 검토하지 못했다”며 “내년도 예산에 반영하도록 지시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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