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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촬영 계의 "거물" 유재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전문영화인의 국비양성기관인 영화아카데미 졸업생 일동은 최근 정년 퇴임한 그들의 스승 한 사람을 위해 간단한 송별회를 가졌다. 1년 코스의 영화아카데미는 현재 7기생이 재학 중으로 6기까지의 졸업생(약 1백 명)들이 떠나는 스승을 위해 모임을 가진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정년 퇴임한 스승이란 영화진흥공사 수석촬영기사였던 유재형(1933년생).
그러나 그는 계속 촉탁으로 근무한다. 그에게서 배운 조감독 한 명은『그에게선 아기자기한 인정미를 느낄 수는 없으나 그가 가르치는 여러 가지 기술분야의 강의내용은 모두 정확하고 유용하기 이를 데 없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영화진흥공사에는 서독 등에서 들여 온 동시녹음 촬영기를 비롯한 각종 최신 기계류가 수두룩한데 그것이 한번 고장이라도 나면 그가 손을 대야 비로소 제대로 가동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는 한국 영화계 기술 밭에서는 아주 보배로운 존재라는 것이다.
그는 1978년 영화진흥공사 수석촬영기사로 입사하기 전까지 85편의 극영화를 촬영했는데 그중 40여 편이 최인현 감독 연출작품이다.
유재형은 군에 입대해 육군 사진중대에서 근무하며 6년간 뉴스·기록영화 등을 촬영한다.
제대 후엔 90편의 극영화를 촬영한 변인읍 기사의 조수로 5년간 일한다. 한국 최초의 TV방송국인 HLKZ가 화재로 없어지자 그곳에 있던 이기하·홍의연·최덕수 등 연출가의 의뢰로 미군방송인 AFKN-TV의 한국어시간 30분 짜리 프로를 1년간 만들었다. 내용은 서울시내 각 고등학교를 소개하는 정도의 것이었다. 그후엔 KBS전신인 서울중앙방송국 TV방송 창설 멤버로 있다가 반년만에 나왔다.
54편의 극영화를 촬영하고 지금은 미국에 가 있는 김재영 기사가 한국 최초의 컬러영화 『인목대비』(안현철 감독·62년)를 촬영한다고 같이 와서 해보자고 해 한 작품만 거들었다.
현상기술자 이종상이 서독에 가서 아쿠아 컬러 현상기술을 배워 왔다고 하여 시작했는데, 촬영 이 다 끝났는데도 현상기계의 조립이 안돼 스태프 일동이 애를 태웠다.
추석프로였는데 결국 네가 필름은 만들었으나 프린터가 국립영화제작소에만 있어서 사정사정하여 프린트를 만들었다.
김화랑 제작, 안현철 연출, 임병호 제작총지휘로 만들어진『인목대비』는 한국인 손으로 된 한국 최초의 칼라영화였다. 이종상 현상기사는 한국 컬러영화의 선구자로 기억되어야 하겠으며, 그의 현상소는 한국천연색현상소의 전신이 된다.
『인목대비』는 그 당시 국제극장에서 21만 명이 들어 흥행에 성공한다.
유재형이 촬영기사로 데뷔한『또순이』(박상호 감독·63년)는 현재 화천공사 박종찬의 형 박동찬이 제작했었다. 두 번째 작품『모란이 피기까지는』(김기덕 감독·63년)은 현재 삼영 필름 강대진, 양전흥업 강대선의 큰형 강대창이 영화잡지를 발간하며 제작했었다.
최인현이 신 필름에서 나와 처음으로 연출한 사극『사자성』(64년)을 촬영했는데 유한철도 관계했던 이 고려시대 사극이후 사극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태조 이성계』(최인현 감독·65년)때엔 위화도회군 장면을 행주산성 밑에서 3일간 낮 밤을 찍었는데 마지막엔 2백∼3백 명의 엑스트라가 모두 도망가 버려 주연급들만이 남아 그럭저럭 수습해 찍었었다.
강물이 얼음물이라 추워서 견딜 수 없었고 엑스트라의 임금이 너무 싸니까 어쩔 수 없었다.
또한 이 영화에선 이성계의 쿠데타를 노골적으로 묘사하지 못하고 제작진 일동이 낑낑 앓다가 유한철이 낸 아이디어로 위화도회군 병사들이 그를 떠받드는 등 민중봉기 식으로 묘사해 마무리했는데 후에 사학자들로부터 역사 왜곡이라고 말이 많았다.
고증문제는 병사들이 쓰는 투구와 들고 싸우는 무기의 모양에까지 파급되어 왈가왈부 가 많았다.
중국의 청룡도 비슷한 것도 있었고 아라비아 칼처럼 반달형으로 구부러진 이상한 칼도 있었기 때문이다.
유재형은 정창화 감독이 홍콩에서 작업하던 무렵 그의 소개로 가서 정식 계약한 제1호 기술자가 되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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