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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인공지능 ‘시아’의 첫 시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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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이같이 무더운 날에 손수 공을 쳐서 무엇하오. 하인이나 시키지….” 인공지능 ‘시아’(시작하는 아이의 줄임말이란다)의 첫 시집 『시를 쓰는 이유』가 출판됐다는 기사를 접하고 뜬금없이 떠오른 옛말이다. 개화기 양반네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정구를 하는 서양인에게 했던 이 말을 머잖아 우리가 이렇게 바꾸어 말할 날이 오지나 않을까 해서. “이같이 무료한 날에 느껴서 무엇하고 생각해서 무엇하오. 인공지능에 맡기지….”

사회 전 분야서 가상인간 활약
예술가의 열정·고뇌도 담아낼까
인간의 정신 영역은 양보 말아야

‘로지’ ‘루시’ ‘여리지’ 걸그룹 ‘이터니티’ 등 젊고 아름다운 가상 인간(virtual human)의 유명세는 톱스타의 그것에 필적하지만, 어릴 적 즐겨보던 만화영화의 업데이트 버전이라 생각하니 개인적으로는 솔직히 별다른 감흥이 없다. 휴대전화나 TV 조작에 적용한 음성인식 기능도 꽤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 소비자에게 큰 호응을 얻지 못한 것 같다. 굳이 말로 조작하는 것보다 손가락으로 누르는 것이 훨씬 빠르고 편리하니까. 돌 하나 놓을 때마다 경우의 수를 파악하는 능력상 천하의 이세돌 9단이라 해도 수퍼컴퓨터를 능가할 도리가 없을 터이니 그와 알파고가 벌인 세기의 대국(2016년 3월) 결과도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굳이 놀랐다고 하자면 그가 5번에 걸친 대국에서 단 한 번이라도 이겼다는 사실이다. 400㎈ 먹고 대국에 임한 자연지능(?)이 7000만원어치 전기를 소모하며 방대한 데이터를 엄청난 속도로 처리하는 인공지능에 패하는 것은 처음부터 시간문제였을 뿐일 터이니. 체스(IBM ‘딥블루’), 퀴즈(IBM ‘왓슨’), 바둑(구글 ‘알파고’), 포커(카네기멜런대학 ‘리브라투스’)로 이어지는 인간과 인공지능의 대결 결과는 최소한 승패라는 이진법 영역의 연산에 관한 한 인공지능이 인간을 월등히 앞섬을 보여준다.

하지만 인공지능의 판단에 고려할 요건이 늘어나면 상황이 달라진다. 자동차의 완전 자율주행 단계를 레벨 5라고 한다는데, 며칠 전 출시된 최고급 승용차가 아직 레벨 3이란다. 그래도 지금 추세라면 머지않아 레벨 5 승용차가 일반화하리라는 기대를 갖고 여명(餘命)을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낡은 차를 오늘도 ‘닦고 조이고 기름 치며’ 타고 다닌다. 음식을 선반에 싣고 와서 동그란 눈을 깜빡이는 서빙 로봇이나 인천공항에서 길을 안내하는 로봇 ‘에어스타’를 보며 이 녀석들이 무럭무럭 자라서(?) 병들거나 외로운 이들의 벗이 될 날도 머지않으리라 기대한다.

반면 공상과학영화에 등장하는 인간형 로봇(humanoid)은 대체로 ‘우주소년 아톰’ 같은 선한 존재가 아니라 ‘터미네이터’류, 즉 디스토피아의 주역으로 묘사된다. 로봇의 가공(可恐)한 기계적 능력과 고도로 진화한 인공지능을 결합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존재는 그 존재만으로도 공포의 대상이다. 더 이상 사람이 통제할 수 없거나 통제권이 불의한 이에게 쥐어진 상황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그래도 이렇게 거침없이 달려나가는 과학적 성취가 우리에게 판도라의 상자가 아니라 프로메테우스의 불이 되리라는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인공지능을 소재로 한 거의 모든 영화가 한목소리로 경고한 것을 외면할 만큼 어리석지 않으니까.

그런데 이러한 로봇과 인공지능의 눈부신 발전에도 ‘인공정신’(?)이라는 개념은 들어본 적조차 없다. 지능과 정신은 엄연히 다른 것이니 괜한 말을 꺼낸다 싶기도 하지만, 정신적 영역은 신체적 능력(로봇)이나 지적 능력(인공지능)과 달리 결코 인공적일 수 없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래서인지 인공지능 시아가 첫 시집을 냈다는 소식은 영 불편하다. 인터넷에 흔하게 떠도는 인공지능이 그린 그림은 대체로 특정 화가(심지어 특정 그림)의 필체나 상투적 표현에 그치고, 인공지능이 작곡했다는 음악은 간단한 패턴에 의한 ‘뻔’한 단계를 넘는 것조차 버거워 보인다.

1만 편의 시를 학습했다는 시아의 작품이 어떨지 궁금하다. 삶에 대한 숙고와 치열한 예술적 열정, 더 나아가 시공을 초월한 개성까지 담겨 있다면 시인들은 연필을 내려놓을 준비를 해야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3주 동안 식물에 물을 주었다’라는 문장을 받아들고는 ‘식물이 꽃을 피웠다’라고 썼단다. 이만해도 놀랍다고 할 수 있지만, 이렇게 단순한 인과관계의 객관적 서술을 시라고 소개하는 것은 솔직히 마땅찮다. 인공지능, 특히 시아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물리적 측면에서 인간의 이기(利器)로 기능하는 모든 것은 진화해야 마땅하다. 다만,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영역까지 기계에 맡기지는 말자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