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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자유에는 네비게이션 필요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02호 20면

항행력

항행력

항행력
캐스 R 선스타인 지음
박세연 옮김
열린책들

퇴직연금은 근로자 노후자금 형성이란 좋은 취지에서 도입한 제도다. 하지만 복잡한 상품 구조로 가입자를 혼란스럽게 한다. 금융회사를 고르는 것부터 세부적 투자 지시까지 가입자의 선택이 매우 중요하다. 금융지식이 충분치 않다면 답답하기 그지없다.

이럴 때 제도의 설계자가 나름의 모범답안(디폴트 옵션)을 제시하면 어떨까. 가입자가 따를 의무는 없지만 별도의 지시가 없다면 모범답안을 선택한 것으로 간주한다. 강요 대신 옆구리를 찔러 바람직한 결정을 유도하는 ‘넛지’이다.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이자 『넛지』의 공동 저자 캐스 선스타인은 이런 식의 부드러운 개입을 옹호한다. 미국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 넛지와 같은 행동경제학의 성과를 정부 정책에 적극 반영했다. 선스타인은 오바마 행정부에서 백악관 정보규제국장도 맡았다.

전통적 자유주의에선 넛지의 활용을 경계의 눈으로 본다. 일단 제도 설계자에게 불순한 의도가 개입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아니라 해도 개인의 선택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고 주장한다.

『항행력』은 자유주의자들의 넛지 비판에 대해 선스타인이 내놓은 대답이다. 영어 원제(‘On Freedom’)를 우리말로 옮기면 ‘자유론’이라 할 수 있다. 19세기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On Liberty)』을 다분히 의식한 제목이다.

저자는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 논하며 ‘항행력(navigability)’ 개념을 제시한다. 자동차 내비게이션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운전대를 잡은 사람은 이론적으로 어디든 마음대로 갈 자유가 있다. 밀이 『자유론』에서 “다른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거나 자유를 얻기 위한 노력을 방해하지 않는 한 각자가 원하는 대로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 대로다.

그런데 길도 모르는 사람에게 무턱대고 알아서 하라는 게 진정한 자유는 아닐 수 있다. 이때 내비게이션이 있다면 목적지까지 경로를 알려준다. 운전자는 내비게이션을 따를 수도, 원하면 다른 길로 갈 수도 있다. 넛지의 역할은 내비게이션처럼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고, 최종 선택은 개인의 자유다. 선택의 자유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항행력까지 갖춰야 진정한 자유가 가능해진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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