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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세상](42) '슬기로운 직장생활'의 조건

중앙일보

입력

차이나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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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이다. 1989년 대학 졸업 직전 첫 출근을 했으니 33년여 직장생활을 했다. 퇴직이 코 앞이다. 같은 연배의 보통 남성들이 대략 30~35년 정도 직장 생활한다는 걸 고려하면, 필자 역시 할 만큼 했다.

직장인의 가장 큰 즐거움은 월급이다. 꼬박꼬박 통장에 쌓인다. 다음 달에도 돈이 들어올 거라는 믿음, 그건 생활의 엄청난 힘이다. 계획을 세울 수 있고, 생활의 규모를 정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기에 직장은 소중하고, 고마운 존재다.

또 다른 즐거움은 승진이다. 신입사원으로 취업해 대리, 과장, 차장을 거쳐 부장으로 진급한다. 이사로 승진해 임원대열에 오르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채 아쉬움을 남기고 떠나기도 한다. 어쨌든 직장인은 승진에 울고, 승진에 웃는다.

직장인은 승진에 울고, 승진에 웃는다. 드라마 '미생'의 한 장면.

직장인은 승진에 울고, 승진에 웃는다. 드라마 '미생'의 한 장면.

우리는 승진을 '昇進'으로 표현한다. 위로 올라가니 승진이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승진을 '晉升(진승)'이라고 쓴다. 위로 올라가는 건 마찬가진데 우리는 '進'을 쓰고 그들은 '晉'을 쓴다. 우리말 승진이 단순히 위로 올라간다는뜻인 데 비해 '晉'은 '올라가서 빛난다'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오늘의 주역 주제는 '슬기로운 직장생활'이다. 35번째 괘 '화지진(火地晉)'을 뽑았다. 불로 상징되는 리(離, ☲)와 땅을 상징하는 곤(坤, ☷)이 위아래로 구성되어 있다.

땅에서 불이 올라오니, 해가 뜨는 형상이다. 해는 동쪽에서 떠 종일 서쪽으로 이동한다. 한 번도 쉼이 없다. 만물은 태양에 의지해 하루를 산다. 해바라기는 해가 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스산한 동굴에 있던 동물은 밖으로 나와 햇볕을 쬔다. 그래서 괘 이름이 '해가 뜨니 만물이 나아간'라는 뜻의 '晉(진)'이다(晉, 進也. 日出, 萬物進).

사람도 다르지 않다. 해가 뜨면 나가 일하고, 해가 질 때는 들어와 쉰다. 고대 농사일도 그랬고, 현대 직장 생활도 그렇다. 3000년 전 농사일과 현대 직장생활에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주역의 기술(記述)은 현대 직장 생활에 적용해도 손색이 없다. 그게 주역의 생명력이다.

주역 35번째 괘 '화지진(火地晉)'은 불로 상징되는 리(離)와 땅을 상징하는 곤(坤)이 위아래로 구성되어 있다. /바이두

주역 35번째 괘 '화지진(火地晉)'은 불로 상징되는 리(離)와 땅을 상징하는 곤(坤)이 위아래로 구성되어 있다. /바이두

효(爻)를 따라가면서 주역이 제시하는 '슬기로운 직장생활'을 살피자.

첫째 효(아래에서 첫 번째 효), 신입사원 시기다.

신입사원은 어벙하다. 학교에서 배운 지식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요즘은 어쩐지 몰라도 필자 때에는 복사, 자료 정리로 일을 시작했다. 선배들에게 핀잔도 많이 들었다. '화지진' 괘 첫번 째 효사(爻辭)는 그런 신입에 이렇게 충고한다.

晉如, 摧如, 貞吉, 罔孚, 裕無咎

'나아가니 좌절을 겪는다. 그러나 바름을 지키면 길하다. 믿음을 얻지는 못하지만, 느긋하게 생각하면 허물이 없다.'

주역은 느긋하게 여유를 가지라고 말한다. '사무실 분위기 파악에는 복사만큼 좋은 게 없다. 자료 정리는 업무 파악의 첫걸음이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공자(孔子)는 자기 영역을 만들라고 했다. 그는 효사를 설명하면서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전문 영역을 발굴하고 묵묵히 힘을 쌓는 게 옳다(獨行正也)"라고 했다. 아직 맡은 일이 없기 때문에 책임질 일도 없다. 그러니 여유를 가지라는 얘기다.

둘째 효, 주목받기 시작하는 단계다.

'이 직장이 나에게 맞는 건가?' 입사 3년 차가 흔히 하는 고민이다. 업무를 파악해보니 대충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위에서는 일을 맡기지도, 알아주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직을 생각하고, 슬럼프가 찾아온다. 두 번째 효는 이렇게 말한다.

愁如, 貞吉. 受玆介福, 于其王母

'근심이 있어도 정도를 걷는다면 길하다. 왕모로부터 큰 복을 받기 때문이다.'

묵묵히 자신의 역량을 닦아가는 직장인은 언젠가는 위 사람의 눈에 띄게 마련이다. 직원 중에서도 능력자를 발굴하고, 그가 역량을 펼치도록 도와주는 게 바로 회사가 할 일이다. 두 번째 효는 바로 그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왕모(王母)는 '리더의 효'로 불리는 제5 효(아래서 다섯 번째 효)를 말한다. 이를 왕모(王母)로 표현한 것은 음(--)이 왔기 때문이다. 왕모로부터 복을 받는다는 것은 결국 회사가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회사는 실력 있는 직원을 발탁해 관리에 들어간다. "입사 3년이면 회사에서 어느 정도 성장할지 대략 가늠이 간다"라는 말이 그래서 나온다.

보이지 않는 '왕모'가 당신을 눈여겨보고 있음을 명심할 일이다.

공자는 '화지진' 괘 첫 효를 설명하며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전문 영역을 발굴하고 묵묵히 힘을 쌓는 게 옳다(獨行正也)″라고 해석했다. /바이두

공자는 '화지진' 괘 첫 효를 설명하며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전문 영역을 발굴하고 묵묵히 힘을 쌓는 게 옳다(獨行正也)″라고 해석했다. /바이두

세번 째 효, 주변의 신임을 얻는 단계다.

직장인은 30대에 배우고, 40대에 신나게 일하고, 50대에는 부하 직원들 관리하고, 60대가 되면 물러갈 준비를 하게 된다. 셋째 효는 역동적으로 일할 40대를 묘사하고 있다. 부장 승진을 앞둔 시기이기도 하다. 직장인으로 성공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되는 때이기도 하다. 주역은 이렇게 충고한다.

衆允, 悔亡
무리가 신임하니, 후회가 사라진다.

회사는 그 자체가 작은 세계다. 그곳에도 정치가 있고, 세력 다툼이 있고, 심하면 음모가 있다. 실력만으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사내 정치'라는 게 현실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드라마 '미생'은 이를 현실감 있게 그려내기도 했다.

핵심은 주변 선후배, 동료의 신임이다. 실력만 있다고 다 승진하는 건 아니다. 프로젝트 하나 성공하려 해도 어려 부서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들의 도움을 이끌어낼 수 있느냐가 성패를 좌우한다. 그러기에 인간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임원으로 승진하고 싶다고? 그럼 주변 사람들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독불장군이 승승장구하는 경우는 없다.

넷째 효, 어긋난 직장인이다.

모든 직장인이 다 회사 일에 헌신적인 것은 아니다. 때로는 자리 욕심이나, 재물 욕심을 채우는데, 회사를 이용하기도 한다. 분파를 만들기도 한다. 실력보다는 사내정치에 도가 튼 사람도 있다. 주역은 이런 사람에게 경고를 잊지 않는다.

晉如鼫鼠, 貞厲

'나아가 쥐같이 활동하니, 아무리 곧아도 위험하다.'

석서(鼫鼠)는 밭에서 곡물을 갉아먹는 큰 쥐다. 주역의 시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고먹는 사람'을 석서에 비유하곤 했다.
여기 석서는 '일그러진 직장인'으로 비친다. 실력이 아닌 아부로 승진을 하려하고, 후배나 동료의 공을 가로채려 하고, 동문이니 동향이니 어울리면서 분파를 만들려고 한다. 그런 직원을 솎아내고, 묵묵히 일하는 실력자를 발탁하는 회사라야 미래가 있다.

드라마 '미생'에서 나온 박 과장과 같은 사람이 바로 '석서'다. 중동에 중고자동차 판매하면서 코미션 챙기려 꼼수를 뒀던 인물…. 그 역시 결국 쫓겨나야 했다.

드라마 '미생'에서 나오는 박 과장. 중동에 중고자동차 판매하면서 코미션 챙기려 꼼수를 뒀던 인물이다. 그 역시 결국 쫓겨나야 했다.

드라마 '미생'에서 나오는 박 과장. 중동에 중고자동차 판매하면서 코미션 챙기려 꼼수를 뒀던 인물이다. 그 역시 결국 쫓겨나야 했다.

다섯 번째 효, CEO의 모습이다.

전체 괘의 모양을 보자(䷢). 흔히 '리더의 효'로 불리는 제5 효는음효(--)이면서도 아래 곤괘(☷)의 지지를 얻고, 위아래 양효(─)와 호응한다. 게다가 밝게 빛나는 리(離, ☲)괘의 핵심이다. 회사 내 최고 선망의 대상이자, 스스로 빛나는 존재…. 그게 주역이 그리는 CEO의 모습이자, '슬기로운 CEO'의 전제 조건이다.

悔亡, 失得勿恤, 往吉, 無不利

'후회가 사라진다. 득실을 걱정하지 마라. 무엇을 하든 길하다.'

CEO는 비전을 제시하는 존재이지 직접 영업 현장에서 뛰는 사람이 아니다. 쪼잔하게 득실을 따지면 아래 사람은 일할 수 없다. 믿고 과감하게 그들에게 일을 맡겨야 한다. 직원들에게 마음껏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CEO가 할 일이다.

CEO는 위기 속에서 기회를 찾는 사람이다. 자기 신념이 뚜렷해야 한다. 한 번 세운 계획을 강단 있게추진할 수 있어야 한다. 낙관적이어야 한다. 그래야 돈맥이 보인다. CEO가 '우리 직원들 믿는다. 무엇을 하든 잘 될 것이다'라는 확신을 가져야 회사는 큰다.

여섯째 효, 회사 총수(總帥)의 역할이다.

CEO의 다음 단계이다. 괘 형상으로 볼 때는 밝음(晉)이 극한에 이르는 형상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강한 성격(양효, ─)의 회사 총수가 과도하게 힘을 뻗치는 모습이다.

晉其角, 維用伐邑, 厲吉無咎, 貞吝

'뿔까지 나아갔으니, 오로지 도읍 정벌에만 사용하면 위험하긴 하지만 허물은 없다. 바름을 견지하는 데 인색하다.'

중국 송(宋)대의 주역 대가 정이천(程伊川)은 '도읍 정벌(伐邑)'을 '내부 단속'이라고 표현했다. 외부 정벌에는 '사방(四方)'이라는 단어를 써야 한다는 해석이다. 회사 총수의 힘은 맹수의 '뿔'과 같다. 받치면 치명상이다. '뿔'을 휘둘러야 한다면 최소한 범위에 그쳐야 한다는 게 주역의 뜻이다.

그러나 그게 쉽지 않다. 기업인은 생리상 돈을 벌면 사업을 확장하게 되어 있다. 돈의 논리가 그렇다. 요즘 말로 '문어발식 확장'이다. 그래도 '외부 정벌'은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게 주역의 충고다. 같은 업계에서의 확장(도읍 정벌)에 그쳐야지 다른 업계(사방 정벌)까지 진출하겠다고 뿔을 휘둘러서는 안 될 일이다. 문어발식 경영으로 몰락한 기업이 한둘 아니다.

'화지진' 효사로 추적한 단계별 '슬기로운 직장생활', 여기까지다.

주역 '화지진' 괘가 원래 직장생활을 주제로 한 것은 아니다. 땅에서 해가 떠오르면 만물이 해를 따르듯, 현명한 지도자가 다스리고 여러 현자(賢者)가 함께 나아가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이를 현대 직장생활에 비유한 것은 순전히 필자의 상상력이다. 사원으로 시작해 작은 회사 CEO까지 맡았던 직장 경험이 글 쓰는 데 도움 됐다.

직업윤리도 시대에 따라 변한다. 요즘 세대의 직장 관과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공감할 수 있을지는 독자 판단에 맡긴다.

한우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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