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S 전화로 유인 … 통장서 돈 빼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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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지난달 25일 경기도 고양시의 이모(67)씨 집.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세금 환급 관련 국세청 전화입니다. 환급받으실 분은 1, 9번을 누르십시오"라는 자동응답시스템(ARS) 안내였다. 숫자를 누르자 한 남성이 전화를 받으며 "상반기 세금이 잘못 고지돼 확인이 필요하니 주민등록번호, 계좌번호, 휴대전화 번호를 알려 달라"고 말했다. 이씨가 이를 알려주자 이 남자는 "확인 결과 56만3800원이 잘못 부과됐다"며 "예금인출 카드를 들고 집 근처 현금인출기(ATM)에서 기다리라"고 통보했다.

이후 이 남자는 "카드를 넣고 계좌이체 버튼과 비밀번호를 누르라" "환급에 대한 통신비밀보호법에 따라 불러 주는 숫자를 그대로 입력하라" "인증번호 009864000을 누르되 00은 화면에 뜨지 않으니 유의하라"며 이씨에게 휴대전화로 지시했다. 이씨는 별다른 의심 없이 순순히 따랐다. 그러나 통신비밀보호법에 따라 불러 줬다는 숫자는 사기단의 계좌번호였고, 인증번호는 이체할 금액이었다. 다음날 이씨가 은행 잔고를 확인하니 986만4000원, 801만7000원, 541만6000원 등 세 차례에 걸쳐 2300여만원이 통째로 빠져 있었다.

국세청과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사칭해 과납금을 돌려준다며 통장에서 거액을 빼돌리는 사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현재 서울과 부산, 안양.고양 등 경기도 일대, 충북 제천 등 전국적으로 경찰에 접수된 피해 사례만 340여 건에 이른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송모(45)씨도 이달 8일 국민건강보험공단 직원이라는 여성에게 비슷한 수법으로 당했다. 이 여성은 "건강 보험금 65만3200원이 잘못 부과됐으니 환급받으라"며 "가까운 ATM에 가서 전화를 기다리라"고 했다. ATM에 간 송씨는 여성이 불러 주는 절차에 따라 '환급계좌번호'와 '인증번호 009984600'을 차례로 눌렀다. 계좌번호는 사기단이 위조여권을 사용해 만든 것이었고, 인증번호는 이체 금액 998만4600원이었다.

◆ 환급 사기 중국 조직폭력단=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는 국세청과 건강보험공단 직원을 사칭해 세금.보험금을 환급해 준다며 돈을 가로챈 혐의(상습사기)로 중국 폭력조직 '삼합회'의 하부조직인 '신의안파' 소속 조직원 H씨(52) 등 중국인 4명을 구속했다고 15일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은 송씨로부터 990여만원을 이체받아 가로채는 등 비슷한 수법으로 8월부터 최근까지 9명으로부터 1억500여만원을 가로챈 혐의다. 이들은 위조여권을 사용해 시중 7개 은행에 가.차명 계좌를 개설했다. 경찰은 압수한 장부에 시중 은행 계좌 291개가 범행 대상으로 적혀 있고, 하루에 4000만~1억4000만원씩 챙겼다는 피의자 진술에 따라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외국인 통장 개설 절차가 간단하고 1회 인출 한도액이 크다는 점 때문에 범행 대상으로 한국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권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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