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대학 특기자 전형에 '구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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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2000년 서울 강남 B고의 김모군은 학생 과학발명품 경진대회에 '생이가래(물풀의 한 종류)가 주변 환경에 미치는 영향 조사'라는 연구물로 최우수상을 받았다. 학교 성적이 중하위권이었던 김군은 수상경력 덕분에 2년 뒤 유명 사립대 특기자 전형에 합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연구물은 김군의 작품이 아니었다. 당시 서울시교육청 김모(51) 연구관이 김군의 학부모로부터 5000만원을 받고 대신 만들어준 것이었다. 김 연구관은 성적이 신통치 않아 고민하던 김군의 부모에게 먼저 접근해 "발명품 경진대회에서 상을 받으면 대학 입학이 쉽다. 돈이 좀 들지만 고액 과외비에 비하면 싼 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양한 인재를 뽑기 위해 도입된 대학입시 특기자 전형이 일부에선 악용되고 있다. 학부모들이 수천만원대의 돈을 주고 자녀들을 발명.과학 경진대회에서 상을 받게 한 뒤 명문대 특기자 전형을 통해 부정입학시킨 사실이 경찰에 적발된 것이다.

경찰청 특수수사과는 15일 김씨를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 혐의 등으로 구속했다. 경찰은 또 김씨에게 돈을 준 학부모 이모(42.여)씨 등 3명을 뇌물공여 혐의로, 지도교사 명의를 빌려 준 백모(45.여)씨 등 교사 8명을 업무방해 혐의로 각각 불구속 입건했다.

◆ 돈을 주고 입학한 셈=서울 강남에서 15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던 김씨는 재력 있는 학부모에게 "고교내신 3등급이라도 경진대회에 입상하면 명문대 특기자 전형에 합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씨는 발명품이나 연구물을 만든 뒤 학생 과학발명품 경진대회나 과학전람회에 학생 이름으로 대신 출품했다. 발명경진대회 서울예선 심사위원으로 위촉된 경력이 있는 김씨는 심사과정을 잘 알고 있어 대리작들을 무난히 입상시킬 수 있었다. 출품에 반드시 필요한 지도교사 명의는 다른 교사에게서 빌렸다.

이렇게 입상한 5명의 학생들은 Y대 대입 발명특기 전형에 무난히 붙을 수 있었다. 이 중 한 명은 이미 졸업했고, 세 명은 재학 중이다. 또 다른 한 명은 올해 4개 대학의 특차전형에 지원했다고 경찰은 전했다.

김씨는 학부모들에게서 1억5800만원을 받았으며, 자신의 아들과 딸도 같은 방법으로 대학에 입학시켰다. 김씨에게 돈을 건넨 학부모들은 펀드매니저.건설업체 및 중소기업 대표인 것으로 드러났다.

◆ 구멍 뚫린 대입 특기자 전형=현재 각 대학에선 다양한 특기자 전형을 운영하고 있다. 이해찬 전 교육부 장관 시절 외국어.컴퓨터.논술.발명 등 한 가지만 잘해도 대학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입된 제도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특기자 전형의 문제점을 드러냈다. 특기자 전형의 기준이 되는 일부 경진대회는 심사 과정이 크게 허술한 것으로 조사됐다. 심사위원들이 미리 제출한 작품 설명서를 읽어 본 뒤 2~3분간 면접으로 심사가 끝나기 때문에 위작이나 대리출품 등 부정을 가려내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현실이다.

이번에 문제가 된 과학기술부 주최의 발명경진대회와 과학전람회에서는 매년 486명이 각종 상을 받았다.

경찰 관계자는 "각종 경진대회가 난립하고 있지만 선발.심사 과정이 허술해 악용될 소지가 다분해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Y대의 경우 특기자 전형은 수상경력 60%, 추천서.자기소개서 15%, 면접 25%로 이뤄진다. 특기적성을 평가하거나 검증하기 위한 별도의 절차는 없다. 다른 대학도 사정은 마찬가지라고 경찰 관계자는 전했다.

이 대학 관계자는 "부정입학한 학생들은 법원 판결이 나올 경우 입학을 취소하겠다"며 "2008년도 입시부터는 특기전형을 대폭 줄일 방침"이라고 말했다.

이철재.권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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