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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 같은 엔저·재정 중독, 혁신은 사라졌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793호 21면

일본이 선진국에서 탈락하는 날

일본이 선진국에서 탈락하는 날

일본이 선진국에서 탈락하는 날
노구치 유키오 지음
박세미 옮김
랩콘스튜디오

일본의 경제평론가 노구치 유키오(野口悠紀雄·81) 히토츠바시대 명예교수는 지난해 12월 12일 일본 경제전문 매체에 엇비슷한 내용의 칼럼을 동시에 실었다. ‘일본은 20년 후 경제 규모에서 한국에 추월당한다.’ ‘월급이 오르지 않은 일본과 오른 한국, 무엇이 다른가.’

새삼스럽게 웬 일본 경제 침체론인가 했다. 그런데 그가 쓴 이 책을 펴는 순간 놓을 수 없었다. 일본이 바닥 모를 침체에 빠져든 이유와 과정을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분석해놓았기 때문이다. 일본 경제를 놓고 ‘잃어버린 10년’이 회자되던 2000년 전후에 나왔던 책들과는 많이 달랐다.

저자에 따르면 아베노믹스는 주가는 올렸지만 근로자는 가난하게 만들었다. [로이터=연합뉴스]

저자에 따르면 아베노믹스는 주가는 올렸지만 근로자는 가난하게 만들었다. [로이터=연합뉴스]

그 당시 책들은 일본 경제 쇠락의 서막을 알리는 데 그쳤다. 1985년 미국 주도의 플라자 협정을 통해 엔화가 달러당 300엔에서 100엔 가까이 고평가되면서 일본 기업들은 급속도로 수출 경쟁력을 잃게 됐다. 결국 엔고(高) 시대가 열리고 그 충격으로 일본 경제는 1990년을 정점으로 거품이 빠지기 시작했다.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해 곰 한 마리도 다니지 않는 산골에도 도로를 내면서 재정을 뿌려댔지만 결국 막대한 국가부채만 남기고 경제는 살아나지 않았다.

어느새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을 훌쩍 넘기고 있다. 노구치 교수는 30년간 일본 경제가 어떻게 무너져내렸는지 정밀 분석했다. 분석의 핵심 키워드는 기업 생산성 저하와 아베노믹스가 빼앗아간 근로자 임금이다. 이 과정에서 일본 자민당과 기업은 ‘공범’으로 드러났다. 기업은 기술력 향상은 소홀히 한 채 “엔고 때문에 수출이 어렵다, 임금 인상이 불가능하다”고 입버릇처럼 호소했고, 자민당은 이에 동조해 끝없이 엔저(低)를 유도해왔다.

그 결정판이 2013년 본격화된 아베노믹스다. 아베노믹스는 금융완화·재정확대·기업혁신이라는 세 개의 화살로 경제 회생을 도모했다. 그러나 금융완화는 일본 경제를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게 하는 독배가 됐다. 재정확대는 지난 30년 일본 경제를 침체의 수렁에 빠뜨린 모르핀이었던 만큼 버릴 수 없었다. 기업혁신은 구두선에 그쳤을 뿐이다. 노구치 교수는 아베노믹스가 일본 기업의 주가는 끌어올렸지만, 가난한 근로자를 더 가난하게 했다고 분석했다.

콥-더글라스 생산함수를 이용해 그 원리를 설명했다. 이 생산함수는 경제성장이 노동과 자본이라는 두 가지 생산요소에 의해 결정된다고 본다. 노동과 자본이 부가가치를 생산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이런 상황에선 결국 기술진보에 의해 경제가 성장한다. 기술진보는 경제학적으로는 혁신에 의해 늘어나는 총요소생산성(TFP)을 의미한다. 실제로 일본에선 소니·도요타 이후에는 글로벌 기업이라고 할만한 혁신 기업이 나오지 않고 있다. 그 결과 임금이 억제되고 있다.

현재 일본 근로자의 실질임금은 1990년대 중반에 비하면 10% 이상 하락했다. 1인당 연간 실질임금은 1997년 391만엔으로 정점을 찍은 뒤 2020년에는 370만엔을 기록했다. 기업들이 엔저를 통해 수익을 얻게 되자 주가가 올라도 임금을 올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마약처럼 엔저도 중독되다 보니 약발이 떨어졌다는 점이다. 일본 기업들은 지난 30년간 인건비가 싼 해외로 공장을 옮겨 간 탓에 최근 달러당 135엔 수준의 엔저가 찾아와도 수출 효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

노구치 교수는 일본 경제가 1인당 국내총생산(GDP)에서 한국에 밀릴 것이라는 전망까지 내놓았다. 하지만 한국에는 강 건너 불이 아니다. 규제를 혁파하고 혁신을 통해 생산성을 높이지 못하면 일본의 전철을 피할 수 없다. 한국은 이미 저성장의 터널 속에 있다. 한국 경제가 일본을 앞지른다는 말은 신기루처럼 사라질지 모른다. 오히려 ‘일본이 선진국에서 탈락하는 날’이 ‘한국이 선진국 문턱에서 미끄러지는 날’로 바뀔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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