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화 교수의 디지털 세상 ⑧ 가상공간의 경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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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머니를 받기 전 헐벗은 게임 속 캐릭터(위)와 게임머니를 받고 장비를 갖춘 캐릭터의 모습.

온라인 게임 '거상'에서 물건을 사고 파는 저잣거리의 모습.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는 가상공간에서 애완동물을 키우는 콘텐트를 만드는 고펫츠라는 회사가 있다. 어느 날 에릭 베스키 사장은 직원들이 일을 하는 척하면서 몰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사장은 아이템거래 중개사이트로 들어가서 중국인 캐릭터 육성업자에게 돈을 주고 직원들의 캐릭터들을 맡겼다. 얼마 후 60레벨(만렙)로 성장한 자기 캐릭터를 돌려받은 직원들은 보너스를 받은 것보다 더 기뻐했다. 베스키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직원들은 업무 때문에 게임을 충분히 즐길 수 없어요. 사장은 열심히 일해 준 직원들에게 그들이 포기한 즐거움을 찾아줘야 할 책임이 있죠.”

#현실공간의 돈으로 가상공간의 시간을 산다

이화여대 디지털미디어학부는 디지털 스토리텔링 연구를 위해 교수와 학생이 함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한다. 학부의 길드는 이오나 서버에 있고 군주는 박승호 교수다. 다른 교수가 실험 실습실에 들어갔다가 자신의 지도학생이 며칠째 똑같이 11레벨인 것을 발견했다.

"자네는 왜 공부를 열심히 안 하나? 박 교수님 지도학생들은 다 말을 타고 다니는데(40레벨 이상). 정말 창피하군." "저는 남편 키우고 애 키우느라 캐릭터 키울 시간이 없어서요."

교수는 아이템거래 중개사이트에 있는 자신의 개인 적립금에서 2만7000원을 덜어 게임머니 1000골드를 사 학생에게 주었다. 학생은 그 돈으로 가방부터 4개 사고 갑옷과 칼을 좋은 것으로 바꾸었다. 또 지나가는 사제에게 사례금을 주고 사냥할 때 죽지 않게 힐(치유술)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학부에서는 앞으로 아이가 있는 기혼자에 한해 캐릭터 육성보조금을 게임머니로 지급하기로 했다.

#가상공간 경제의 미래 가치

위의 사례는 사람들이 왜 현실의 돈을 주고 가상 공간의 재화들을 구매하는지 설명해 준다.

가상 공간은 출발점에서의 평등과 경쟁 결과의 불평등이 공존하는 세계다. 사용자들은 모두 똑같은 상태로 태어나지만 자신이 가상 공간에 투자한 시간과 노력에 따라 다양한 지위와 활동반경을 갖게 된다. 이러한 사회적 다양성은 가상 공간만이 가능한 현실감과 재미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여건상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없었던 낮은 레벨의 사용자들은 다양한 형태의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된다. 허름한 갑옷을 입고 무디고 느린 무기를 들고 있는 게임 속 캐릭터가 있다고 하자. 할 수 있는 일도, 갈 수 있는 장소도 제약되어 있다. '저 무기만 있으면''저 갑옷만 있으면''저 레벨에만 도달하면' 많은 것을 할 수 있다고 사용자가 판단할 때, 현금이라고 하는 현실의 재화가 가상 공간으로 유입된다.

이와 같은 현금 거래는 한국의 가상 공간 경제가 해결해야 할 시급한 현안이다. 한국에는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달한 온라인 가상 공간과 낙후된 입법 환경이 공존하고 있다. 그 결과 현재 거의 모든 사용자가 이용하는 아이템 현금 거래가 불법으로 규정돼 있다.

근 8년에 걸쳐 이 문제가 제기됐지만 한국 정부와 국회는 아무런 법제도도 마련하지 못했다. 8년은 충분한 시간이었다. 사행성 및 범죄를 조장하는 아이템 현금거래에는 강도 높은 처벌 조항이 마련됐어야 했고, 청소년들의 아이템 거래는 엄격하게 금지됐어야 했다. 그리고 대다수의 건전한 아이템 현금 거래가 양성화돼 법적으로 보호됐어야 했다.

2006년 미국 자본은 이처럼 법이 부재하고 계정 명의도용 사건, 바다 이야기 사건 등으로 여론이 흉흉해진 틈을 이용해 한국 시장을 독점해 버렸다. 한국의 아이템 거래 시장은 아이템베이와 아이템매니아 두 회사가 1위, 2위를 다투면서 시장의 90%를 점유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의 IGE닷컴이 아이템매니아를 인수하고 아이템베이까지 매각협상을 완료한 것이다.

가상 공간의 아이템 거래는 오늘날 한국에서 1조원 정도에 불과한 작은 시장이지만 점점 더 가상화돼 가는 미래 경제에서 100조원, 200조원이 될 수 있는 중요한 시장이다. 오늘날 사용자들이 인터넷을 켜면 나타나는 네이버나 다음 같은 포털 사이트들은 모두 신문잡지와 비슷한 텍스트 기반의 HTML 문서로 돼 있다. 그러나 앞으로의 웹 페이지들은 점점 더 게임의 가상공간과 비슷한 3차원 그래픽의 VRML 문서로 변해갈 것이다. 그 나라 언어를 모르면 다룰 수 없는 텍스트 기반 문서보다 그래픽 기반 문서가 훨씬 더 정보화, 세계화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온라인 게임은 시장에서 가장 성공한 디지털 콘텐트다. VRML문서 기반의 가상화된 경제는 이러한 온라인 게임의 아이템 거래 시장을 중심으로 다른 재화들을 융합하고 재매개(remediation)하는 방식으로 발전해나갈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되면 한국은 자신이 가장 먼저 개척한 온라인 가상공간에서 주도권을 잃고 초창기의 아주 작은 성취에만 만족한 채 도태돼 갈 것이다.

미래의 사학자는 '금속활자.자격루.거북선.온라인 가상공간'에서 역사를 관통하는 동일한 현상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문명권의 중심부와는 거리가 먼 변방국가에서 이공계 인재들이 홀연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기술을 발명해낸다. 이 기술이 얼마나 심각한 의미를 갖는 것인지 깨닫지 못한 문과계 인재들은 항상 정치 놀음에 바쁘다. 기술은 외따로 방치됐다가 이십 년쯤 지나면 그 선구적인 의의를 잃어버린다. 변방국가는 계속 변방국가로 살아간다.

글=이인화 교수<이화여대 디지털미디어학부.소설가>

취재 및 연구보조=신새미.임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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