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mily] 시댁·친정·이웃과 김치를 버무려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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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게 김장 이벤트 해 봐요
한창 김장을 담그고 있는 오성식((左)에서 셋째)씨 가족들. 수능을 코앞에 둔 고3 정주((左)에서 둘째)까지 "나도 한 포기만 담가 보자"며 거들었다. 손자가 버무려 입에 넣어주는 김치 맛에 할머니 임민자((左)에서 첫째)씨는 더욱 신이 난다. 김성룡 기자

김장철입니다. 최근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도시에 사는 주부 755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했더니 "집에서 김장을 하겠다"는 응답자가 47.2%를 차지했답니다. 김치냉장고의 활약 덕에 김장이 제대로 부활한 셈이지요. 하지만 김장을 앞둔 주부들 마음 한쪽은 김치냉장고만큼이나 무겁습니다. 세상 편해졌다지만 다듬고, 절이고, 자르고, 버무리는 과정 하나하나가 여간 복잡하고 힘들어야 말이지요. 그 부담을 이벤트로 승화시킨 풍경을 찾아봤습니다. 시댁과, 친정과, 이웃과 함께 잔치처럼 벌이는 김장 이벤트.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도 했고,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도 했으니, 어울리면 흥이 나게 마련 아니겠습니까.

12일 오전 서울 신원동 오성식(49)씨 집 마당. 70세 노모의 지시에 따라 오씨와 동생 기식(44)씨가 김칫소를 버무리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다. 무 30개를 채 썰어 넣고, 고춧가루.파.마늘.생강에 생새우.갓.미나리 등을 섞어 만드는 김칫소다. 커다란 '고무다라이'속에 고무장갑 낀 두 손을 담가 온몸을 돌려가며 휘젓고 있지만 어머니 눈에 차기는 쉽지 않다. "치대지 말고 섞으라니까!" 다 된 듯해 대충 다독거려 놓으려는 마음을 어머니는 금세 눈치채셨다.

오씨 집 김장은 전날인 11일 이미 시작됐다. 경기도 안양에 사는 동생 부부도 이날 아침 일찍 왔다. 집 옆 텃밭에서 배추.무.파 등을 뽑는 것이 김장의 첫 순서. 올해는 60포기를 담가 두 집이 나눠 먹기로 했다. 지난해만 해도 100포기 넘게 담갔는데 아이들이 커갈수록 집에서 밥 먹는 일이 줄어 김장 규모도 해마다 감소한다. 배추를 절이는 과정은 어머니가 전담한다. 김치 맛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과정이어서다. 두 며느리가 김장 재료를 씻고 다듬으면, 두 아들이 채 썰고 자르는 일을 맡는다. 절여 놓은 배추를 헹궈 물기를 빼놓는 일 역시 아들들 몫이다.

"5년 전만 해도 남자들 출근한 평일에 어머니와 며느리들만 김장을 했어요. 어머니가 아들들 부엌일하는 거 싫어하셨으니까요. 그땐 진짜 힘들었는데 이제 온 가족이 함께하니까 잔치 분위기예요."

큰며느리 조순덕(46)씨는 "이제 나는 김장날 점심 식사만 신경 쓰면 된다"며 만족스러워했다. 이날 점심 메뉴는 돼지고기 보쌈과 동태 찌개.굴무침. 배춧잎 한켜 한켜 들춰가며 소 넣느라 두세 시간 바람 찬 마당에 앉아 있던 가족들에겐 꿀맛 정찬이다.

경기도 분당에 사는 주부 김윤미(43)씨는 해마다 언니.여동생과 함께 친정에서 김장을 담근다. 김장 준비부터 이벤트다. 10월 말께 젓갈을 사러 친정어머니와 함께 인천 소래포구로 나들이를 다녀왔다.

"새우젓도 미리 사고, 아귀찜도 먹고. 어머니가 정말 즐거워하셨어요. 우리도 김장 핑계로 바다 구경하며 재미있게 놀았죠."

신이 나기는 김장날도 마찬가지다. 마루에 물기나 양념이 묻지 않도록 커다란 비닐을 깔고, 네 모녀가 머리에 비닐모자를 쓰고 작업을 시작한다. 수다 꽃을 피우며 무 채 썰고, 파 다듬고 하다 보면 어느새 점심시간. 어머니가 끓이신 구수한 배추된장국으로 뚝딱 해결하고 오후엔 썰어 놓은 재료를 모두 섞어 소를 만들어 배추를 버무린다. 한참 일하다 출출해지면 치킨을 시켜 새참으로 먹는다. 평소 고기를 잘 안 드시는 어머니까지 맛나게 드실 정도록 흥겨운 분위기가 이어진다.

이웃도 김장 품앗이 상대로 손색없다. 경기도 수원에 사는 박영자(44)씨는 같은 성당에 다니는 이웃 다섯 명과 매년 김장 품앗이를 한다. 안주인이 배추를 절이고 씻어 물기를 빼는 것까지 해두면 나머지는 품앗이 용사들이 해결해 준다. 무 채 썰고 버무리고, 간 보고, 넣어 주고 뒷정리까지 싹 해주는 것. 정작 안주인은 김장 담그는 동안 국 끓이고, 돼지고기 삶는 게 일이다. "같이 수다 떨면서 일도 금방 해치우고, 밥도 같이 먹고. 이젠 김장 스트레스에서 벗어났답니다."

이지영 기자



조심! 흥 깨져요

코빼기도 안 보이고
거저 좀 먹어도 될까요 ?

늘어지는 자식·남편 자랑
김장은 입으로 하나 ?

모여 한다고 모두 짐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거저 먹으려는 사람'이 끼어 있으면 흥이 깨진다.

결혼 8년차 주부 이모(37)씨는 지난해 김장을 생각하면 아직도 분하다. 시누이와 함께 시댁에서 김장을 하기로 했는데, 김장날 오후 3시가 넘어도 시누이는 오지 않았다. 시어머니가 전화를 해서야 "쇼핑하러 나갔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리니 좀 늦게 가겠다"는 말을 들었다. 김장이 끝날 때까지 시누이는 오지 않았고, 시어머니는 한 술 더 떠 이씨에게 "집에 가는 길에 시누이 집에 들러 시누이 몫의 김치를 갖다 주라"는 게 아닌가. "겨우내 김치를 사먹더라도 다시는 김장날 시댁에 안 갈 것"이라는 게 이씨의 결심이다.

이웃 품앗이에도 복병은 있다. 지난해 아이 친구 엄마들끼리 김장 품앗이를 했다는 주부 최모(40)씨는 "한 엄마가 손은 더디면서 입만 벌리면 아이 자랑, 남편 자랑을 하는 바람에 모두 피곤해했다"고 말했다.

결국 김장 담그기가 즐거운 이벤트가 되려면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씀. 하기야 이런 마음으로 서로 통한다면야 세상에 힘든 일이 무에 있으랴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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