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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예수뎐] '하나님 이름'조차 들먹인 마귀의 소리…기적이란 무엇입니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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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성호의 예수뎐]

나는 비탈길을 걷다가 작은 바위 위에 앉았다. 저 아래 갈릴래아(갈릴리) 호수가 보였다. 성경에 등장하는 ‘마귀 들린 사람들’ 일화를 품고서 눈을 감았다. 그들은 누구일까. 성서에는 그들이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도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기도”(마르코 복음서 5장 5절) 했다고 한다. 그리스어 성서에는 “En krazonkaikatakoptonheautonlithois”라고 되어 있다. 영어로는 “through all day and night among the tombs and in the mountains he was crying and gashing himself to stones”이다.

예수의 이적 일화를 깊이 묵상하다 보면 어김 없이 깨달음이 밀려온다. 이적 일화 뒤에는 울림의 메시지가 있다. [중앙포토]

예수의 이적 일화를 깊이 묵상하다 보면 어김 없이 깨달음이 밀려온다. 이적 일화 뒤에는 울림의 메시지가 있다. [중앙포토]

(48) 예수의 이적 일화, 왜 남의 이야기로만 들릴까

먼저 ‘through all day and night’을 보자.  그들은 낮과 밤을 통틀어 내내 사로잡혀 있었다. 고통의 시간이었다. 우리가 고통에 빠질 때도 마찬가지다. 낮도 어둠이 되고 밤도 어둠이 된다. 고통은 밤낮으로 계속된다. 그러니 얼마나 괴로웠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울부짖으며(crying), 자신의 몸을 돌에다 내려쳤을까(gashing himself to stones). 우리 삶도 그렇다. 우리도 종종 ‘무덤과 산(among the tombs and in the mountains)’속에 갇힌다. 그렇게 어둠 속에 갇힌다. 그 속에서 소리쳐 울면서 자기 몸을 돌에다 내려친다.

사람들은 생각한다. 다른 누군가가 돌로 내 몸을 때리는 것이리라. 그런데 그게 아니다. 내 몸을 내려치는 이는 나 자신이다. 고통을 자처하는 이는 바로 나 자신이다. 무엇 때문일까. 욕망으로 인한 어둠, 집착으로 인한 착각 때문이다. 그런 ‘악마’로 인해 어둠이 생기고, 그 어둠 속에서 내가 나를 내려치게 된다.

그런 우리를 보면서 예수는 말한다.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을 물리친 예수는 이제 악마에게 명령한다. 예수는 악마의 정체를 꿰뚫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무엇으로 인해 생겨나고, 어떻게 작동하고, 어디로 사라지는지 알기 때문이다.

‘마귀들과 돼지 떼’ 일화는 마르코(마가) 복음서, 마태오(마태) 복음서, 루카(누가) 복음서, 이 세 복음서에 등장한다. 마태오 복음서에는 마귀 들린 사람이 두 명으로 기록되어 있고, 나머지 두 복음서에서는 한 사람으로 나온다.

예수 당시에는 갈릴래아 호수 주위에 아픈 이와 병든 이들이 많았다. [중앙포토]

예수 당시에는 갈릴래아 호수 주위에 아픈 이와 병든 이들이 많았다. [중앙포토]

예수가 그 사람에게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 물음에 대한 마귀 들린 사람의 답이 놀랍다. “제 이름은 군대입니다.”(마르코 복음서 5장 9절) 이유도 덧붙였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어 성서에서 ‘군대’라는 단어는 ‘legeon’이다. 영어로는 ‘legion’이다. 로마 시대의 군대에서 ‘군단’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였다.

무슨 뜻일까. 그 사람 안에 마귀가 떼로 들어가 있다는 말이다. 이는 우리 속에 살고 있는 욕망의 숫자와 겹친다. 내 안의 욕망, 내 안의 집착, 내 안의 고집. 그 숫자가 어디 한둘일까. 수십, 수백, 수천으로도 어쩌면 모자라지 않을까. 그러니 ‘군대’인 셈이다.

아무리 많은 욕망의 군대도 예수의 한마디에 사라진다. 당시 주위에는 놓아서 기르는 돼지 떼가 2000마리쯤 있었다고 한다. 마귀 들린 사람은 “저희를 쫓아내시려거든 저 돼지 떼 속으로나 들여보내 주십시오”라고 청했다. 그러자 예수는 “가라!” 하고 말했다.

마귀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돼지 떼는 비탈을 달려 내려가 호수에 빠져 죽었다. 왜 그랬을까. 예수의 한마디에 왜 마귀들이 물러갔을까. 예수 안에서 빛나는 ‘신의 속성’ 때문이다. 다시 말해 빛이다. 천 년에 걸쳐 쌓인 두꺼운 어둠이라 해도 촛불 하나 켜는 순간에 사라지고 만다. 그것이 빛의 힘이다.

이 일화에는 뜻밖의 대목도 있다. 마귀 들린 사람이 예수를 만났을 때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마르코 복음서 5장 7절) 마귀 들린 사람은 놀랍게도 ‘하느님의 이름’을 들먹였다.

누구의 소리일까. 하느님의 소리일까 아니면 마귀의 소리일까. 그렇다. 그것은 마귀의 소리다. 우리 안에서 꿈틀대는 욕망의 소리다. 그 욕망은 수시로 ‘하느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우리에게 다가온다. 2000년 전 성서는 이미 그것을 말하고 있다.

갈릴래야 호수의 옛모습이다. 지금은 호수 주위에 휴양 도시가 들어서 있다. [중앙포토]

갈릴래야 호수의 옛모습이다. 지금은 호수 주위에 휴양 도시가 들어서 있다. [중앙포토]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우리 주위에 그런 욕망의 소리가 없을까. ‘하느님의 이름’을 앞세운 욕망의 소리, ‘하느님의 이름’으로 변장한 고집의 소리, ‘하느님의 이름’으로 위장한 착각의 소리. 그런 소리가 없을까. 우리는 행여 그것을 ‘하느님의 소리’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지는 않을까. 예수는 그 모든 소리를 향해서 말했다. “가라!” 영어로는 “go away!”, “사라져버려라!”라는 뜻이다.

갈릴래아 호수 앞에는 마른 갈대가 우거져 있었다. 주변에는 푸른 풀들이 보였다. 돼지 떼는 저 호수로 달려 들어가 죽음을 맞았다. ‘더러운 영들’의 죽음이다. ‘더러운 영들’은 그리스어로 ‘akathartonpneumaton’이다. 영어로는 ‘unclean spirits’이다. 더러운 영들이 죽으면 어찌 될까. ‘깨끗한 영(clean spirit)’이 된다. 그래서 마귀 들린 사람이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더러운 마음’은 언제든 ‘깨끗한 마음’이 될 수 있다. ‘unclean spirits’이 ‘clean spirit’이 되듯이 말이다. ‘예수’를 통과하면 된다. 예수는 ‘산상설교’에서 분명하게 말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오 복음서 5장 8절)

마르코 복음서에는 ‘더러운 영들’이 등장하는 대목이 또 하나 있다. 예수는 갈릴래아 일대를 돌면서 가르침을 펼쳤다. 효율적인 가르침을 위해서는 제자들이 미리 가서 예수 일행이 머물 숙소와 설교 대상, 마을의 분위기, 설교 장소 등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낯선 마을로 파견했다. 제자들이 가서 ‘설교 준비’를 꾸려놓으면 예수가 직접 가서 설교를 하는 식이었다.

마르코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마르코 복음서 6장 7절)라고 기록돼 있다. 그렇게 떠나간 제자들은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주었다.”(마르코 복음서 6장 13절)라고 한다.

예수의 이적 일화는 사람에 따라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다. 문자 그대로 믿는 이도 있고, 이적 일화에서 은유와 비유, 상징을 통해 깊은 메시지를 끌어내는 이도 있다. [중앙포토]

예수의 이적 일화는 사람에 따라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다. 문자 그대로 믿는 이도 있고, 이적 일화에서 은유와 비유, 상징을 통해 깊은 메시지를 끌어내는 이도 있다. [중앙포토]

예수뿐만 아니었다. 제자들도 많은 마귀를 쫓아냈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을까. 예수의 가르침이다. 거기 깃든 ‘신의 속성’이다. “많은 마귀를 쫓아내다.”라는 대목은 그리스어 성서에 “daimoniapollaexeballon”으로 표현돼 있다. ‘쫓아내다’라는 뜻의 ‘exeballon’에는 ‘비워버리다(evacuate)’의 뜻도 담겨 있다. 내 안의 악마, 내 안의 욕망을 비워서 쫓아버린다는 의미가 된다.

누군가에게는 성서가 ‘나의 이야기’이고, 누군가에게는 성서가 ‘남의 이야기’이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성서에 담긴 예수의 메시지는 화살이다. 이런저런 일화를 통해 예수는 끊임없이 활시위를 당긴다. 그 화살이 과연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예수가 당기는 활시위가 열두 제자나 동시대 유대인들을 향한다고 생각하면 성서는 ‘남의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과녁이 그쪽이기 때문이다.

반면 예수가 당기는 활시위를 돌려 자기 가슴 앞에서 멈추는 이도 있다. 그런 사람은 예수의 과녁이 되기를 자처한다. 그럴 때 예수가 쏘아대는 화살이 어디에 꽂힐까. 그렇다. 나의 몸, 나의 마음에 꽂힌다. 그럴 때 우리 내면이 성서와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예수의 화살이 ‘타닥! 탁! 타닥!’ 하며 내 안에 박힐 때 비로소 ‘더러운 영’이 죽기 때문이다. 그렇게 ‘비워진(evacuated)’ 곳으로 ‘깨끗한 마음’이 드러난다.

그러니 투덜댈 필요가 없다. 성당에 다닌 지 20년이 됐는데, 혹은 교회에 다닌 지 30년이 됐는데 왜 아직 ‘성령’을 체험하지 못했나 하고 자책할 필요도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그런 투덜댐이 아니다.

성경 속에 담긴 예수의 어록에는 화살이 담겨 있다. 나를 부수고 하늘이 열리게 하는 화살이다. 그 화살 앞에 나의 가슴을 갖다대는 일, 그게 진정한 묵상이다. [중앙포토]

성경 속에 담긴 예수의 어록에는 화살이 담겨 있다. 나를 부수고 하늘이 열리게 하는 화살이다. 그 화살 앞에 나의 가슴을 갖다대는 일, 그게 진정한 묵상이다. [중앙포토]

성서에서 겨누고 있는 예수의 화살 앞에 자기 가슴을 갖다 대고, 자신을 겨냥한 이야기로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까. 스스로 자처해서 과녁이 되면 되지 않을까. 그래서 날아오는 화살의 빗줄기를 맞으며 두 팔을 벌리면 되지 않을까. 바로 거기에 ‘자기 십자가’가 있으니까.

〈49회에서 계속됩니다. 다음 주는 쉽니다.〉

짧은 생각

성경에는 여러 이적 일화가 있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물 위를 걷기도 하고,
물을 포도주로 바꾸기도 합니다.
이 모두가 ‘예수의 이적’입니다.

그런 이적 일화를 읽다 보면
어쩐지 남의 이야기를 읽는 것만 같습니다.
2000년 전 이스라엘에 살았던 예수와 유대인,
그들의 이야기를 읽는 것만 같습니다.

2022년에 살고 있는 나는
늘 그 이야기의 바깥에 서 있습니다.

성경은 진리를 담은 책입니다.
진리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관통합니다.
그래서 진리입니다.
다시 말해
2000년 전에 발생한 이적 일화라 해도
그게 진리라면
지금의 나를 관통해야 합니다.
왜냐고요?
그게 진리의 속성이니까요.
성경은 진리를 담은 책이니까요.

저는 이 대목에서 각자의 ‘묵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이야기지만
나의 이성과 지식과 논리를 허물며
온전히 ‘예수의 이야기’로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에게서 ‘내맡김’을 봅니다.
예수를 향한 전적인 내맡김,
거기에서도 그리스도교 영성의 꽃이 핍니다.
자신의 일상에서
모든 걸 예수 그리스도에게 내맡기는 사람,
우리는 그들을 ‘수도자’라고 부르니까요.

또 어떤 사람은
이적 일화에 담긴 은유와 비유와 상징을 통해
그 속에 흐르는 ‘본질적 울림’을 길어올립니다.
그 울림과 울림에 담긴 메시지를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입니다.
옛날에 벌어진 이스라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자신의 이야기로 말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에게서 ‘십자가’를 봅니다.
2000년 전의 예수에게서
직접 건네받는 ‘자기 십자가’ 말입니다.
거기서도 꽃은 핍니다.
그리스도교의 영성이 담긴
아름다운 꽃이 핍니다.

예수를 향한 전적인 내맡김도 좋고,
예수가 겨누는 화살 앞에
내 가슴을 갖다대는 일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쪽이든
그들이 바라보는 별이
서로 다르지 않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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