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셰익스피어 공연사에"큰 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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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의 사랑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처럼 가련하고 아름답다. 다만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는 사랑을 위해 로마의 권력과 왕실의 영광을 아낌없이 버렸다는 것이 젊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과 다를 뿐이다.
안토니는 용감하게 외치고 있다.『타이버 강물 속에 로마여 녹아 흘러라』고. 이 대사는 안토니의 사랑이 역사의 중압을 이겨내야 하는 고뇌와 시련으로 가득 차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 점이 이 작품의 주제가 된다.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의 사랑이 겪는 고뇌와 시련의 드라마가 곧 이 작품의 플롯이 되고 있는데 연출가 윤호진은 주제의 표출과 드라마의 전개에 있어 신선한 무대적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의 연출이 돋보인 것은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의 사랑과 죽음을 역사적 현실의 컨텍스트 속에서 부각시킴으로써 운명과 선택, 지상적인 것과 천상적인 것, 사랑과 권력의 이중구조를 콘트라스트의 방법으로 명확히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격 창조면에서도 그는 안토니의 남성적 욕구와 야심을 클레오파트라의 여성적 갈망과 본능에 대조시키면서 동시에 이들 주인공들의 드라마를 주변인물의 배경을 통해 부각시키는 효과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특히 숱한 장면의 연속과 전환을 빠른 템포와 간결한 액션으로 처리한 그의 연출적 민감성은 놀랄만한 것이었다.
안토니역의 이호재는 승리와 패배의 역사적 파노라마 속에서 영원한 사랑의 특징을 박진감 넘치는 대사처리와 이에 상응하는 연기적 액션을 통해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클레오파트라역의 이혜영은 놀라운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연기는 밤하늘의 불꽃처럼 화려하고 폭발적이다.
그녀는 또한 여인의 모든 것을 클레오파트라를 통해 보여주는데 성공하고 있었다. 특히 여인의 질투·분노·슬픔, 그리고 사랑의 표현에 있어 이혜영은 연기의 한 전형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연기는 세 장군의 세계를 왜소하게 보이도록 만들만큼 넓고 깊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여인의 사랑이 이 세상 모든 것을 초월하고 압도하는 최후의 평화며 안식인 것을 관객들에게 설득하는데 아무런 부족함이 없었다. 그녀의 연기가 없었으면 이번 무대는 중심을 잃었을 것이다. 그녀는 이번 무대를 순조롭게 흘러가게 한 무서운 추진력이었다.
이번 공연에서 관심과 주목의 대상이 된 것은 영국인 화라씨의 무대 미술이었다. 무대의 구성·색조·리듬이 살아있는 디자인이었다. 그의 무대미술은 이 작품의 숨은 뜻을 색과 형상으로 효과적이며 통일성 있게 살려내고 있다. 그의 미술은 공간의 변화, 등장인물의 성격과 심리적 상태까지를 수용해 표현하고 있다.
이밖에도 배우 반석진, 홍계일, 서학, 김인수, 이승호, 강기용, 정보석 등의 연기도 인상적이었다. 실험극장 30주년 기념 공연『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는 한국 셰익스피어 공연사에 길이 남을 획기적인 공연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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