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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안덕근 한반도평화워치

통상 전쟁터 된 인도·태평양…신통상질서 수립 나서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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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태평양 통상전쟁과 한국의 전략 

안덕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안덕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촉발된 민주주의 동맹의 안보와 외교·경제 연대는 미-중 통상 대결 국면을 급격히 신냉전의 지경학 구도로 바꾸고 있다. 자국 산업 육성을 위해 러시아·중국의 자원과 시장이 절실하던 유럽연합(EU)이 결국 돌아서면서 신북방정책을 내세우던 우리 정부의 통상정책과 이에 편승하던 산업계의 사업전략도 대폭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더욱이 EU와 러시아의 대치로 태평양에서 전개되는 통상전쟁의 전운도 한층 짙어졌다.

바이든 행정부는 내년 중순을 목표로 제시하며 본격적으로 인도·태평양경제협력체(IPEF)를 통한 신통상질서 구축에 나섰다. 반면 아세안이 주도해온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을 사실상 장악한 중국은 이제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까지 넘보며 태평양으로 위세를 키우려 한다. 일본은 CPTPP를 토대로 영국·대만·한국, 그리고 궁극적으로 미국까지 포괄하는 경제동맹을 구축해 중국에 맞서는 아시아 맹주 지위의 회복을 꾀한다. 열강들의 긴장이 고조되는 태평양 지경학의 한 축을 차지하는 한국도 태평양 통상전쟁에 대비해야 한다.

통상 협상이 기술·안보 포괄하며 한반도가 통상 각축 한복판에 놓여
국제사회 가치와 원칙 지키고 위기에 처한 국제 통상체제 재건해야
새 정부는 무역 흑자 집착하는 중상주의 탈피해 중장기적 접근 필요
정부·산업계 역량 모아 교역국들과 협력하는 개방형 통상전략 정비해야

센카쿠·사드로 동아시아 경제협력 냉랭

안덕근의 한반도평화워치

안덕근의 한반도평화워치

1990년대 후반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한·중·일 3국은 경제협력 필요성을 절감했다. 2000년 금융협력부터 시작해 2011년 9월에는 한·중·일 협력사무국을 서울에 설치했다. 이후 한·중·일은 2012년 5월 투자협정을 체결하고 12월에는 FTA 협상을 개시해 동아시아 경제협력의 기대를 한껏 부풀렸다. 그러나 센카쿠(중국명 댜오이다오) 열도 분쟁, 사드 배치와 중국의 한한령 보복 조치, 대법원의 강제 징용 배상 판결에 이은 일본의 대한국 수출통제조치 등 정치·외교 분란이 연이어 터지면서 동아시아 경제협력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사실 일본 소재와 부품을 한국이 중간재로 가공하여 중국에서 완성품으로 조립해 수출하는 동아시아 분업 체제는 2000년대 초반부터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동력으로 작동했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 때에도 세계 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했던 동아시아 공급망은 2010년대 중반부터 내부의 정치 위기로 균열을 보였다. 세계 무역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동아시아 산업 생태계는 이제 교역관계를 무기화하려는 경제안보전략이 충돌하는 격전지로 변하고 있다.

현재 동아시아의 정치·외교 변수는 세계 경제 관점에서 가장 큰 불확실성 요인 중 하나다. 우리 경제는 2000년대 초반을 구가하던 차이메리카(미·중 협력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차이나와 아메리카를 합친 표현) 시절 중국 중심의 공급망에 맞추어 산업 지형이 재편되다가 미·중 통상전쟁의 최전선에 내몰리면서 공급망 분리의 홍역에 시달리고 있다. 새 정부의 통상전략은 동아시아 산업생태계 재편의 비용을 최소화하고 우리 산업 공급망의 안정화에 주력해야 한다.

한·일 현안, 한국의 CPTPP 가입 선결 요건

수년간 아세안+3(한·중·일)로 진행되던 논의에 호주·뉴질랜드·인도가 추가되면서 2012년 RCEP 협상이 시작됐다. 아세안과 개별적으로 체결된 6개국 FTA들을 통합하는 형태라 비교적 쉬운 협상이라 여겼다. 하지만 2020년 7월까지 31차에 걸친 공식 협상 끝에 결국 인도가 빠지고 2022년 1월에서야 발효되었다. 미·중 분쟁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한·중·일을 포함한 15개국이 타결한 FTA라는 점은 중국의 대외경제외교 성과로 주목받았다. RCEP 서명 직후 시진핑 주석이 선언한 대로 중국은 2021년 9월 CPTPP 가입을 공식 신청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탈퇴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미국이 고집한 20개 조항을 빼고 CPTPP로 되살렸다.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출범 이래 농산물 시장은 거의 개방하지 않던 일본이 아베노믹스의 기치 아래 CPTPP에서 전면적인 개방안을 수용했다. 이를 토대로 일본은 미국·EU와 다른 국가들보다 한 차원 높은 무역협정을 체결했다.

CPTPP는 높은 수준의 시장 개방과 함께 디지털 통상, 국영 기업, 기술 표준, 위생 검역, 중소기업, 규제 조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WTO보다 진일보한 통상 규범을 제시한다. 따라서 우리가 가입하면 실질적으로 한·미 FTA보다 높은 수준의 한·일 FTA가 체결되는 상황이다. 그러나 농수산업계의 반발에 더해 후쿠시마산 수산물 수입과 위안부 및 강제 징용자 피해 보상과 관련한 한·일 외교 현안은 현실적으로 한국의 CPTPP 가입 선결 요건이 될 전망이다.

한편 영국·중국에 이어 대만도 CPTPP 가입 신청을 계기로 태평양 통상전쟁에 출사표를 던졌다. 대만은 2002년 1월 공식적으로 WTO 회원국 지위를 확보했으나 중국의 위세에 밀려 FTA 경쟁에서 낙오되었다. 이제 미·중 대결 구도 속에서 대만은 중국으로 흡수된 홍콩을 대체하는 아시아의 긴요한 민주주의 교두보로 부상했다. 반도체 공급망의 중요성까지 더해지면서 대만은 미국이 주도하는 기술통상동맹의 기둥 역할을 자임한다. 국민투표로 미국산 돼지고기 수입을 재개한 데 이어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까지 허용한 대만은 현재 CPTPP 가입에 국력을 총동원하고 있다. 이 문제는 민주주의 동맹과 친중 진영 간의 충돌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가운데 태평양 통상전쟁의 뇌관이 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 주도 인·태경제협력체에 적극 나서야

트럼프 행정부가 무역 보복 표적으로 겨눈 ‘중국제조 2025’ 정책을 중국이 발표하기 1년 전인 2014년 인도는 ‘메이드 인 인디아(Make in India)’ 정책을 선언하고 25개 전략산업 육성 사업을 시작했다. 중국이 압도해온 소비시장과 생산기지의 역할을 대체할 경제 규모를 가지고 민주주의를 표방하며 영어를 사용하는 인도는 중국·러시아에 맞서는 태평양전략의 핵심으로 인식된다. 이미 우리 산업계도 중국에서 인도로 산업기반을 이전하고 있다. 인도는 삼성전자의 최대 스마트폰 생산 시설을 포함해 최근 해외 투자의 주요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가 본격적인 대중국 전략으로 IPEF를 추진하면서 RCEP에 불참해 중국과 거리를 둔 인도의 전략적 위상은 한층 커졌다. 하지만 도하라운드와 RCEP 협상 이탈에서 보여준 국수주의 성향을 고려하면 인도와 연대하려는 IPEF 합의 여부는 불투명하다.

다자통상체제를 배격하고 TPP에서 탈퇴하며 양자 간 무역협상을 고집한 트럼프 행정부도 임기 마지막 해에는 쿼드(미국·일본·호주·인도 4자 협의체)에 한국·뉴질랜드·베트남 등을 포함하는, IPEF와 매우 유사한 구성의 경제번영네트워크를 추진했다. 이는 바이든 행정부의 IPEF가 향후 정권의 향방과 관계없이 초당적으로 추진될 것임을 시사한다. 현재 미국 무역대표부(USTR)와 상무부가 각기 주요 협상 의제를 나누어 산업계 입장을 수렴하고 있다. 노동, 경쟁 정책, 환경, 공급망 강화, 디지털 통상, 탄소 중립 등 전면적으로 신통상질서 구축에 나선 미국의 의지와 역량을 보여줄 시험대다.

특히 TPP와 같은 기존 FTA 협상과는 다르게, IPEF는 관세 인하를 통한 시장 개방 사안은 다루지 않고 새로운 규범 수립에 초점을 둔다. 따라서 협상 타결 후 대부분 의회의 비준을 받지 않는 분야별 합의문 형태로 참여국 간 실질적 산업 협력이 추진될 전망이다. 신뢰하는 동맹국 간 안정적인 공급망과 기술·산업생태계를 공동 구축하는 경제안보전략이자 새로운 통상협력체계 구축에 우리 정부도 적극 나서야 한다.

신뢰받는 선진 통상국가 수립

통상 협상이 기술과 안보를 포괄하는 경제안보 실행 전략이 되면서 한반도가 태평양 통상 각축의 한복판에 놓였다. 새로 출범하는 우리 정부는 신뢰받는 선진 통상국가 수립을 목표로 신통상질서 구축에 적극 나서야 한다. 국제사회가 지향하는 가치와 원칙을 지키고 위기에 처한 국제 통상체제를 재건하는 것이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는 우리 산업계를 지키는 최선의 방편이다.

수출과 무역 흑자 규모에 집착하는 중상주의 방식에서 탈피해야 중장기적인 시각에서 국가의 위상과 산업의 발전을 증진할 수 있다. 무역 이익만을 좇는 근시안적 사고는 우리의 무역 관계 전부를 인질로 잡히는 우를 범하게 된다. 앞으로 더욱 거세질 태평양의 통상 격랑을 헤쳐가기 위해서는 우리 경제와 국제 통상체제를 지탱할 신통상질서 수립이 절실하다. 정부와 산업계의 역량을 한데 모으고, 가치와 원칙에 합의하는 교역국들과는 널리 협력하는 개방형 선진 통상전략을 정비할 때다.

안덕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