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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인터넷주소'를 지키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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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얼마 전 학생 선발과 관련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베이징의 이민심사관이 공항 출국대에서 내게 던진 한마디는 가위 충격적이었다. 그는 내 한국 여권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당신의 중국(한문)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즉시 "한국인"이라고 답했지만, 그는 비웃듯이 "You are Korean?"이라고 되물었다. 심사대를 걸어 나오며 마음이 여간 씁쓸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마치 "중국 이름을 쓰면서 네가 무슨 한국인이냐"고 추궁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글.우리말이 없었다면 어떠했을까. 문득 중국의 동북공정 전략이 뇌리를 스쳤다. 세계화의 물결이 아무리 거세도 각국 고유의 문화와 언어는 존중되는 것이 마땅하다. 요즘 우리가 편리하게 사용하는 한글 인터넷 주소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국민이 한글 인터넷 주소에 커다란 애착과 자긍심을 갖고 있는 것은 단순히 국가주의적(Nationalism) 성향에 대한 집착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전 세계 모든 나라가 서로 존중하는 상호주의적 세계관의 표출이라고 봐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요즘 인터넷 주소창을 놓고 벌어지는 논란에 눈길이 쏠린다. 세계적인 다국적기업 마이크로소프트(MS)가 인터넷 서비스의 관문인 인터넷 주소창을 검색창화하는 전략을 구사함으로써 영어 이외의 언어에 대한 주소 기능을 막으려 한다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인터넷 주소 사용에 대한 공공적 권익을 침해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선 사회적 환기가 필요하다.

한글(혹은 자국어) 인터넷 주소 서비스 영역은 국제 표준화 경쟁이 매우 치열한 분야며 중요성이 매우 크다. 이 경쟁은 인터넷 초창기부터 영어 위주로 표준화 작업을 주도해온 미국과 비영어권 국가들이 기술.정치적 주도권을 쥐기 위한 샅바 싸움이라 할 수 있다. 인터넷 비즈니스를 주도하고 있는 미국은 갖가지 기술.관리적 이유를 내세워 인터넷에서 정보기술(IT)과 관련된 모든 자원이 영어로 표현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한국을 비롯해 중국.일본.러시아.프랑스.터키.아랍권 국가들은 자국어 표준화 활동을 전개하며 반(反)영어 입장을 표방하고 있다. 이들 국가는 나아가 국제관계에서 상호주의에 입각해 자국어 인터넷 주소 체계로의 표준화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자국어 인터넷 주소는 사용자 자신의 정체성과 자원.자산에 대한 인터넷상의 표현을 지원하는 공공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국내적으로 우리가 한글 인터넷 주소를 온라인상의 공식 주소로 인정할 때 비로소 국제사회에서도 자국어 인터넷 주소의 표준화를 주도할 수 있는 자격과 명분을 가질 수 있다.

최근 유사한 사례가 국내에서 불거지고 있다. 자국어 인터넷 주소 기술을 개발해 국제특허와 함께 자국어 인터넷 국제 표준화에 나서고 있는 한 벤처기업이 국내 최대 통신사업자와 법적 공방을 벌이고 있는 것도 MS 사례와 유사한 것으로 보여 우려된다.

국회는 인터넷 주소 자원 관리 방안에 대한 개정 법률안을 논의 중이다. 개정 법률안에는 반드시 인터넷 주소(한글.자국어 포함)에 대한 개방적 접근(Open Access)과 보편적 서비스(Universal Service) 개념이 적용돼야 한다. 정부는 특히 자국어 인터넷 주소에 대한 우리의 경쟁력을 지렛대 삼아 각국과 공조하면서 자국어 인터넷 주소의 국제 표준을 이끌어내는 데 지원과 관심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황준석 서울대 교수·산업공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