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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에 큰 도움" 세계가 떤다…父 밟은 '파시스트 딸'의 묘수 [후후월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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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프랑스 대선에 출마해 오는 24일 치러질 결선 투표에 진출한 마린 르펜(국민연합) 후보. [AFP=연합뉴스]

2022년 프랑스 대선에 출마해 오는 24일 치러질 결선 투표에 진출한 마린 르펜(국민연합) 후보. [AFP=연합뉴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서방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바라고 있다”

2022년 프랑스 대선 결선투표에 진출해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45·전진하는 공화당)을 위협하는 마린 르펜(54·국민연합) 후보의 발언이다. 14일(현지시간) 러시아 타스통신 등에 따르면 르펜은 이날 프랑스의 한 TV 방송에 출연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제노사이드’(대량 학살)를 자행했다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발언에도 동의하지 않는다며 이같이 말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난 뒤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와 러시아의 화합을 지지한다고도 했다. 나토는 애초 러시아(구소련)에 대항해 결성된 미국과 유럽의 군사적 동맹체다.

이런 외교관을 가진 르펜의 선전에 서방 세계가 긴장하고 있다. 오는 24일 치러질 결선투표 결과 르펜이 당선되면 미국과 서유럽이 주도하는 서방 세계의 질서에 균열이 생길 뿐 아니라 국제 사회에도 지각 변동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지난 8일 발표된 프랑스여론연구소(Ifop)의 여론조사 결과 마크롱 대통령을 뽑겠다는 응답은 52%, 르펜 후보를 뽑겠다는 응답은 48%로 두 후보의 격차는 4%포인트로 나타났다. 최근 르펜은 “그 어느 때보다 승리에 가깝다”며 고무된 심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마린 르펜 국민연합 대표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AP=연합뉴스]

마린 르펜 국민연합 대표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AP=연합뉴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유럽연합(EU)·나토와 러시아 사이의 긴장이 팽팽한 가운데 르펜의 당선은 나토와 EU를 흔들 수 있어 서방 세계 지도자들의 우려가 크다. 더구나 르펜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존경한다고 말하거나, 그와 악수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선거 전단으로 활용한 적도 있을 정도로 과거 친러적 성향을 드러낸 바 있다. 당장 르펜은 13일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당선되면 프랑스는 나토의 통합사령부에서 빠지겠다고 밝혔다. 또 유럽연합에서 당장 탈퇴하지는 않겠지만 이전보다 느슨한 형태의 EU가 되기를 바란다고도 밝혔다.

탈(脫) 나토, 탈 EU를 주장했던 5년 전보다는 순화된 공약을 내놓은 셈이지만 프랑스가 나토와 EU의 중심축이 되는 국가라는 점에서 파장은 작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정치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르펜 당선 가능성을 “특별한 우려”라면서 “르펜 당선 시, 단기적으로는 친우크라이나 연합을 크게 흔들고 장기적으로는 유럽 대륙의 정치 지형을 바꿔놓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는 푸틴 대통령에게 큰 도움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외신들은 평가한다.

르펜은 누구

극우 정당 국민전선(FN)의 설립자 장 마리 르펜(오른쪽)과 그의 딸 마린 르펜. [로이터=연합뉴스]

극우 정당 국민전선(FN)의 설립자 장 마리 르펜(오른쪽)과 그의 딸 마린 르펜. [로이터=연합뉴스]

1968년생인 르펜은 프랑스 극우 정당인 국민전선을 창설한 장마리 르펜의 막내 딸로 지난 2011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당 대표에 취임했다. 르펜이 4살 되던 해 아버지가 국민전선을 창당해 정치에 몰두한 만큼, 르펜의 삶은 아버지의 그늘 속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겨냥한 테러도 경험하고 학교에서는 “파시스트의 딸”이라 불리며 세간의 따가운 시선을 받았지만, 그는 아버지를 옹호할 만큼 사상적 뿌리가 깊은 인물이다. 어머니가 다른 남자를 만나면서 집을 떠난 후 아버지와 정서적으로도 더 가까워졌다고 한다. 파리 2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6년간 변호사 생활을 했지만 1998년 국민전선에 합류해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첫 결혼도 국민전선 지지자와 했다.

하지만 당의 이미지 개선을 위해 아버지를 당에서 축출할 정도로 집권에 대한 집념이 강한 인물이기도 하다. 2015년 아버지가 친 나치 발언으로 논란에 휩싸였을 때 공개적으로 그를 비난하고 당에서 쫓아냈다. 장마리 르펜은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한 가스실은 2차 세계대전의 많은 사소한 일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했고 르펜은 “정치적 자살을 하려는 것 같다, 나는 모든 면에서 장마리 르펜과 의견을 달리한다”고 선을 그었다. 장마리 르펜은 “자식에게서 배반을 당했다”고 한탄했다. 2018년 르펜은 당명도 국민전선에서 국민연합으로 바꿨다.

유년 시절 세간의 따가운 시선에 고통받았던 르펜은 국민연합을 향한 대중의 인식 개선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극우’의 이미지를 희석하고 대중적인 정당으로 거듭나야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표에 만족했지만 르펜은 공직을 원한다”(가디언)  

쇠락한 공업지대에서 노동자들을 만나고 있는 마린 르펜. [AFP=연합뉴스]

쇠락한 공업지대에서 노동자들을 만나고 있는 마린 르펜. [AFP=연합뉴스]

이후 한 번 더 진화한 모습이 오늘날의 르펜이다. 프랑스 북부의 쇠락한 공업지대를 찾아 유권자들과 일일이 손을 잡고, 피부에 와닿는 경제 정책으로 중도 유권자들의 민심을 파고들었다. 유로화, EU, 나토에서 탈퇴하겠다던 공약에서도 한발 뒤로 물러났다.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러시아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반감이 극에 달했을 때는 푸틴과 거리를 두는 발언을 했다. ‘애묘 정치인’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2020년 말 고양이 사육사 자격증을 따면서다. 공식 인스타그램에도 심심치 않게 고양이, 강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며 대중적 친숙함을 더했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대통령 선거를 1~2년 앞두고 적극적으로 표출된 르펜의 ‘고양이 사랑’이 극우 정치인 이미지를 순화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아버지가 표에 만족한 것과 달리 르펜은 권력과 공직을 원한다”고 평가했다.  르펜의 대권 도전은 이번이 세 번째다. 빈센트 마티니 니스 대학 교수(정치학)는 미국 공영방송 NPR과의 인터뷰에서 “(르펜의 이미지가 온건해졌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정치적 성향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며 “여전히 민족주의적이고 외국인 혐오적이지만, 그는 프랑스 안의 세계화의 패자(세계화에 적응하지 못한 노동자들)의 마음을 얻고 있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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