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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롱도 못한 러·우크라 중재…'나토 골칫거리' 이 남자 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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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29일(현지시간) 터키 이스탄불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5차 회담을 환영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29일(현지시간) 터키 이스탄불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5차 회담을 환영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중재자 역할을 자처한 여러 나라 중에 터키가 승자로 떠올랐고, 가장 확실한 성과를 내고 있다.”(가디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지난달 29~30일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린 5차 평화 협상에서 진전을 보였을 때 국제 사회의 눈은 제3국의 정상에게 쏠렸다. 터키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다. 외신들은 그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골칫거리’로 여겨졌던 그가 오랫동안 닦아온 ‘줄타기 외교’를 통해 분쟁의 중재자로 자리매김했다고 평했다.

CNN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에르도안 대통령은 분쟁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메신저 역할을 해왔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침공 명령을 내리기 전인 지난해부터 중재 의사를 밝힌 후 양측을 오가는 광폭 외교를 펼쳤다.

지난달 29일 열린 5차 회담 직전에도 푸틴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직접 통화해 양측 요구 사항을 듣고 의제를 조율했다고 알려진다. 실제 그는 지난달 25일 나토 정상회의 후 귀국하는 전용기 안에서 “양국이 6가지 협상 포인트 중 4가지 포인트에서 합의에 근접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앞서 지난달 10일 열린 양국의 외무장관 회담도 에르도안 대통령의 중재 속에 터키 안탈리아에서 열렸다. 4차례 실무 회담 동안 평행선을 그렸던 양국은 5차 회담을 계기로 정상 회담까지 거론하고 있다.

마크롱도 못했다… 바이든 “터키의 역할 중요”

에르도안 대통령의 활약은 다른 '중재자'들이 성과를 내지 못한 상황에서 두드러진다. 앞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푸틴 대통령과 수십 차례 통화하고, 나프탈리 베넷 이스라엘 총리도 개전 이후 모스크바를 직접 방문하는 등 애를 썼지만 성과가 없었다.

가디언은 30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중재자 역할을 자처한 여러 나라 중에 터키가 승자로 떠올랐고, 가장 확실한 성과를 내고 있다”고 평가했다. 앞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에르도안 대통령과 통화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협상 중재에 터키의 역할이 중요하다. 터키의 노력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지난달 3일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키이우에 방문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서 에르도안 대통령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중재 의사를 피력했다. EPA=연합뉴스

지난달 3일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키이우에 방문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서 에르도안 대통령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중재 의사를 피력했다. EPA=연합뉴스

‘줄타기 외교’의 달인

이처럼 터키가 중국과 프랑스 등 세계 강대국을 제치고 성과를 내는 이유에 대해 주요 전문가들은 ‘에르도안 대통령의 줄타기 외교’와 ‘터키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꼽았다.

 블라드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2019년 10월 22일(현지시간) 러시아 소치에서 열린 회담에서 악수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블라드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2019년 10월 22일(현지시간) 러시아 소치에서 열린 회담에서 악수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나토의 핵심 회원국이면서도 러시아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 온 터키는 개전 초기부터 “어느 한쪽도 끊어낼 수 없다”며 균형 외교를 예고했다. 지난 2월 3일에는 젤렌스키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고, 전쟁이 나자 자국의 공격용 드론을 우크라이나에 판매하며 영토 방어에 도움을 줬다. 또 지난달 초에는 러시아 군함이 자국의 영해인 보스프루스 해협을 지나 우크라이나로 향하는 걸 막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개전 이후 서방 국가의 대러시아 경제 제재에 참여하지 않고, 영공 폐쇄도 하지 않는 등 러시아와 끈을 유지해 왔다.

여기에 터키가 흑해를 두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와 마주 보고 있고, 나토의 핵심 회원국이라는 지정학적 위상도 주요했다. 특히 터키는 개전 이전에도 러시아와 안보·관광 등 부문에서 우호적인 관계를 쌓아왔다. 러시아판 사드로 불리는 S-400 지대공 미사일을 도입하면서 ‘나토의 골칫거리’ 취급을 당하고 미국 등은 터키에 대해 각종 경제 제재를 하기도 했다.

2019년 7월 12일 터키가 러시아로부터 구매한 S-400 지대공 미사일이 옮겨지고 있다. EPA=연합뉴스

2019년 7월 12일 터키가 러시아로부터 구매한 S-400 지대공 미사일이 옮겨지고 있다. EPA=연합뉴스

스티븐 쿡 미국외교협회(CFR) 중동 전문 선임연구원은 포린폴리시 기고에서 “터키는 나토의 핵심회원국이면서 미국 백악관과도 소통창구가 있다”며 “무엇보다 에르도안은 현 지도자 중 푸틴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다른 사람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는 걸로 유명한 푸틴 대통령이지만, 에르도안 대통령만큼은 달랐을 것”이라고 전했다. 푸틴은 2000년 첫 러시아 대통령이 됐고 중간에 총리로 재임한 기간 포함해서 22년간 1인자로 집권 중이고, 에르도안 역시 2003년부터 내각제 총리로서 3연임 한 뒤 2014년부터 임기 5년 대통령제가 도입된 뒤 재선 대통령으로 통치 중이다.

“독일·영국과 어깨 나란히” 전망도

이번 분쟁을 중재하며 에르도안 대통령이 반사이익을 얻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쿡 선임연구원은 “우크라이나 전쟁은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기회”라며 “유럽의 위기를 틈타 독자적인 권력을 형성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터키는 지난해 유럽과 미국으로부터 고립되고 심각한 통화 위기를 겪었다. 모든 것이 절망적인 분위기였다”면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터키가 힘과 위신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고, 독일·프랑스·영국 같은 강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적인 지도자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고 설명했다.

중동전문가인 루이스 피시맨 뉴욕시립대 부교수도 이스라엘 매체 하레츠에 “현재 터키 외교는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다. 터키 입장에선 미국·유럽과의 긴장 관계를 해결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라며 “만약 중재에 성공한다면 에르도안 대통령은 푸틴과의 관계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서방 국가와 긴밀한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 국내 경제적 고통도 완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난해 급락한 터키 리라화 가치.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지난해 급락한 터키 리라화 가치.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다만 CNN은 29일 “터키가 많은 중재자 중 이번 전쟁에서 가장 큰 지분을 가지고 있고, 외교 프로세스를 유지하는 건 중요하다”면서도 “터키의 노력에도 러시아는 여전히 군사적 선택에 혈안이 되어 있고, 전쟁이 끝날 기미는 안 보인다. 전쟁이 길어지면 터키가 줄타기 외교를 포기해야 하는 시점이 올 수 있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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