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불붙은 신자원민족주의]지난 10년간 멈춘 해외 자원 개발, 민간업체가 명맥 이어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781호 10면

SPECIAL REPORT

호주 로이힐 광산에서 채굴된 철광석이 야드에 적치되고 있다. 포스코는 2010년 로이힐 광산 개발에 참여하면서 지분 12.5%를 확보, 연간 약 1500만t을 공급받고 있다. [연합뉴스]

호주 로이힐 광산에서 채굴된 철광석이 야드에 적치되고 있다. 포스코는 2010년 로이힐 광산 개발에 참여하면서 지분 12.5%를 확보, 연간 약 1500만t을 공급받고 있다. [연합뉴스]

1983년 5차 중동전쟁 직전,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우리 정부에 “호르무즈해협에 미사일 한 방만 떨어지면 석유수송이 수개월 중단될 수 있다”며 “최소 90일 정도는 원유 도입 없이 버틸 수 있는 준비를 하라”는 보고서를 보내왔다. 당시 우리나라의 에너지 해외의존도는 98%에 육박했다. CIA의 보고서에 우리 정부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석유는 특히 중동의존도가 83%에 달했기 때문에 중동 지역 정세가 불안해지면 고스란히 그 리스크를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전에도 에너지 위기는 있었다. 중동은 4차 중동전쟁 직후인 1974년과 1978년 두 차례 석유를 무기로 미국을 비롯한 서방에 대한 보복에 나섰다. 1973년 초 배럴당 2.9달러였던 국제유가는 1974년 1월 11.6달러로 올랐고, 1979년에는 23달러가 넘었다. 한국은 1979년 3월 석유 가격을 9.5% 올린 데 이어 1981년 11월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무려 337%나 석유 가격을 올려야 했다. 석유 가격이 오르니 석유로 만들던 각종 화학제품 재료 가격도 폭등했다. 당연히 소비자 물가는 급등했다. 1980년 물가가 무려 40%까지 치솟은 배경이다. 이른바 1차, 2차 석유파동이다.

석유파동을 겪으며 해외 자원 개발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정부는 해외 자원 확보에 나섰다. 김대중 정부는 ‘해외자원개발 기본계획’을 수립해 ‘자원외교’의 기틀을 닦았다. 노무현 정부도 아프리카와 몽골 등지를 오가며 자원외교에 나섰다. 이때 세계 3대 니켈 광산 중 하나인 마다가스카르 암바토비 광산 개발 사업에 한국의 민·관 컨소시엄이 참여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최근 정부가 매각 재검토에 들어간 멕시코 볼레오 광산도 노무현 정부 때 투자 결정이 이뤄진 곳이다. 해외 자원 개발이 본격화한 건 이명박 정부 때인 2008년 이후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원유·가스의 자주개발률(자원수입량 대비 해외자원개발을 통해 확보한 자원의 양)을 2009년 9%에서 10년 뒤 30%로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내걸고 이른바 자원외교에 총력을 기울였다.

관련기사

해외 자원 개발

해외 자원 개발

당시 한국광물자원공사(현 한국광해광업공단)와 포스코, GS칼텍스, LG상사 등 대기업도 정부를 따라 광물자원이 풍부한 남미 지역 공략에 나섰다. 한국광물자원공사는 2010년 볼리비아·아르메니아·아르헨티나 등지에서 소금·구리·몰리브덴·리튬 개발권을 확보하기도 했다. 석유공사도 페루 탐사광구 광권 계약을 따냈고, 카자흐스탄의 남카르포브스키 광구 지분 42.5%를 확보했다. 한국전력은 호주의 유연탄 광산 두 곳의 지분을 사들였다. 김태헌 에너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자원외교는 자원이 희소하고 경제 성장을 위한 석유 개발의 필요성이 대두됐다는 점에서 거시적인 방향은 타당해 보인다”라며 “다만 결과적으로는 사업이 완결성 있게 추진될 수 있도록 세밀한 부분까지 책임감 있게 진행하지 못한 게 아쉽다”고 말했다.

한국의 해외 자원 개발은 그러나 여기에서 멈췄다. 이명박 정부 이후 사실상 자원 개발은 중단됐고, 당시 확보했던 광산 등 해외 자원은 국제유가 하락 속에 대규모 손실이 나면서 청산 위기에 내몰렸다. 국제유가 급락과 공기업의 무리한 해외 자원 개발로 부채가 급증한 측면도 있었지만 박근혜 정부는 공기업 부채 감축을 명분으로, 문재인 정부는 ‘적폐 청산’을 이유로 해외 자산 매각을 추진했다. 한국광물자원공사는 호주 볼리아와 화이트 클리프, 페루 셀레딘 광산 탐사 사업에서 잇따라 철수했다. 2016년에는 페루 마르코나 구리 광산을 매각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인 2018년에는 보유한 해외 자원을 전량을 매각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박근혜·문재인 정부를 거치면서 해외 자원 개발 사업 수는 확 쪼그라들었다. 2011년 230개에서 2017년 139개, 지난해 94개로 급전직하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 기준 국내 공기업이나 민간·개인이 지분 투자 등의 방식으로 참여하고 있는 해외 자원 개발 사업은 휴광을 제외하고 94개로 집계됐다. 이명박 정부 마지막 해인 2012년 말 219개와 비교하면 57%가량 준 것이다. 박근혜 정부 때인 2013~2016년 55개 감소했고, 2017년 문재인 정부 들어 지금까지 70개가 더 줄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공기업이 대규모 손실을 보고 해외 자원을 처분해 국민들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한국석유공사는 2021년 페루에 있는 석유회사를 고작 236만 달러(약 28억원)에 매각했다. 2009년 7억 달러(약 8300억원)주고 산 회사를 껌값에 팔아치운 것이다. 사실상 10년 가까이 해외 자원 개발이 중단되거나 대규모 손실을 보고 폐기된 셈이다. 이 기간 광물 자원 개발률은 32.1%(2012년)에서 28%(2020년)로 내려앉았다. 공기업 해외 자원 개발 투자액도 70억 달러(2011년)에서 7억 달러(2020년)로 쪼그라들었다.

물론 해외 자원 개발 명맥이 완전히 끊긴 건 아니다. 박근혜 정부 이후 민간 기업이 수요가 급증한 2차전지 원자재 수급을 위해 개별적으로 광산 개발 등에 나서고 있다. 탈(脫)탄소 흐름이 빨라지면서 전기차 등 배터리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반면, 니켈 등의 배터리 원자재는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니켈 3개월물 선물 가격은 지난달 초 t당 2만2700달러에서 이달 들어 4만8000달러로 2배 이상 급등했다. 7일에는 장중 5만5000달러로 최고가를 찍었다. 영국 런던금속거래소에선 급기야 8일(현지시간) 거래 중지를 단행했을 정도다. 또 다른 배터리 주원료인 탄산리튬 가격(23일 기준)은 전년 평균 대비 약 315% 올랐다.

포스코는 2010년 호주 로이힐 광산(철광석) 개발에 참여하면서 지분 12.5%를 확보했고, 지난해에는 2700억원을 투자해 호주 레이븐소프 광산(니켈) 지분 30%를 인수했다. 포스코의 한 관계자는 “철광석은 연간 소요량의 25% 이상에 해당하는 약 1500만t, 2024년부턴 연간 니켈 가공품(MHP)을 연간 3만2000t 공급받을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다”고 말했다. 21일에는 아르헨티나 정부와 리튬 공장 증설 및 양극재 생산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LG에너지솔루션도 1월 호주 광산업체 라이온타운과 2024년부터 5년간 리튬 정광 70만t을 공급받는 계약을 체결했다. 리튬 정광은 전기차 배터리의 핵심 소재인 수산화리튬의 원재료다.

LG에너지솔루션은 이외에도 세계 최대 리튬 생산업체 중 한 곳인 칠레 SQM, 독일 벌칸에너지 등과 리튬 공급계약을 체결해 안정적 수급 체계를 대비 중이다. 삼성SDI와 SK이노베이션도 앞다퉈 핵심 소재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상황이다. 삼성SDI는 중국 최대 리튬 생산기업 간펑리튬의 지분 1.8%를 매입했고, SK이노베이션은 중국 EVE에너지와 양극재 합작법인을 세워 원료 직접 생산에 나섰다. LG에너지솔루션 관계자는 “수급 안정성과 고객의 신뢰 확보를 위해 장기공급 계약을 맺으며 선제 조치를 취하고 있다”며 “생산기지도 다변화시켜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인한 제품가 상승의 영향을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나라의 해외 에너지 의존도는 95%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우리나라의 연간 에너지 수입 비용은 약 1267억 달러(154조원)로, 국내총생산(GDP)의 약 7.7%가 넘는다. 대부분 원자재 수입에 의존하는 국내 기업 입장에선 원가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1월 기준 수입물가 상승률은 전년 대비 30.1%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최근 글로벌 경기 동향과 시사점’ 보고서를 통해 국제유가가 연평균 배럴당 100달러에 도달하면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0.3%포인트 하락하고,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1%포인트 상승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경상수지 흑자도 305억 달러(39%) 감소할 것으로 예상했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원자재 가격 상승은 기업에 생산비용이 늘어나는 것으로 소비자 물가로 전이될 것”이라며 “원자재 수입이 늘면서 경상수지에도 부담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은 특히 경제 전반의 원유의존도(배럴/GDP)가 5.7배럴(2020년 기준)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높다. 원유의존도가 높다는 건 우크라이나 사태 등으로 요즘처럼 국제유가가 급등하면 상대적으로 비용 상승 압력이 더 크게 작용한다는 의미다. 이로 인한 매출 감소 등으로 산업 경쟁력이 약화될 수 있다. 변준호 흥국증권 연구원은 “높은 원유가격은 물가 뿐 아니라 경제 성장에도 부정적”이라며 “올해 한국 경제 성장률은 3%로 전망되고 있으나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해 하방 리스크가 커졌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근본적으로 해외 자원에 대한 국가적 대비책과 관리가 부재하다고 지적한다. 강천구 인하대 교수(에너지공학과)는 “원자재 공급망 구축을 위한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며 “지금부터라도 정부와 민간기업이 합동으로 원자재 외교를 펼쳐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강내영 한국무역협회 연구원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계획이 수정되면 지금과 같이 진척이 없는 상황이 될 수 있다”며 “최소한 정부 차원의 지원금만 주고 나머지 비용과 그로 인한 수익은 민간기업이 거둬들일 수 있게 해 시장에 맡기는 게 더 바람직해 보인다”고 말했다.

일본은 민간 기업에 해외자원 개발자금 융자 지원

해외 자원 개발은 ‘해외자원개발사업법’에서 정한 방법에 따라 개발이 이뤄진다. 공공·민간이 해외 현지법인을 통하거나 외국에 기술용역을 제공해 자원을 개발하는 방법이 있고, 개발자금을 융자해 자원을 수입하기도 한다. 2006년 광물자원공사·대우인터내셔널(현 포스코인터내셔널)·STX가 공동 투자한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암바토비 니켈광 사업은 컨소시엄을 구성해 공동으로 지분을 투자하는 형태였다. 암바토비 광산과 코브레파나마 광산은 광물자원공사가 지분을 확보한 케이스다. 암바토비 광산은 2006년 지분투자를 시작해 38.08%를, 코브레파나마 광산은 2009년 10%의 지분을 확보했다.

최근에는 민간 기업 주도의 해외 자원 개발이 활발한데, 민간 기업은 해외 광산 지분을 인수해 권리를 소유하거나 광산개발권을 직접 확보하는 식이다. 현지에 공장을 설립해 자원 수급체계를 구축하기도 한다. 23일(현지시간) 포스코그룹이 아르헨티나 옴브레 무에르토 염호 리튬 상용화 공장 건설에 나선 것이 대표적이다. 칠레·아르헨티나·볼리비아는 최근 자원을 무기화하고 있는데, 이 같은 지역에서는 현지 공장 설립이 더 이득이 될 수 있다.

일본은 독립행정법인인 석유천연가스금속광물자원기구가 스미토모 상사나 미쓰비시에 융자를 지원해 자원 개발에 나서기도 한다. 정부가 민간 기업에 해외자원 개발 융자를 지원해주는 방식인데, 해외에서는 이런 케이스도 있지만 국내에서는 잘 쓰지 않는 방식이다. 이처럼 여러 방식이 존재하지만 수요와 실제 소비량을 고려한 ‘자원별 맞춤형 방식’을 개발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이철규 해외자원개발협회 상무는 “자원 개발을 총괄하는 컨트롤타워를 구축해 광물의 종류와 수요에 따라 해외 자원 개발이 이뤄져야 한다”며 “경제 산업구조와 광물 수요를 어떻게 적절하게 가져갈지 연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수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