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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붙은 신자원민족주의]“상품거래소 세워, 기업 해외 원자재 확보 독려해줘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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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1호 11면

SPECIAL REPORT 

“국가 간 장벽이 전례 없이 높아지면서 원자재 시장은 이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전쟁터가 됐다.” 박호정 고려대 교수(식품자원경제학)는 “비교우위에 입각해 지구촌 국가들이 자유롭게 자원을 주고받는 모습은 앞으로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박 교수는 2월까지 한국자원경제학회를 이끌었고, 한국개발연구원(KDI)과 에너지경제연구원 등을 거친 자원·경제 전문가다. 박 교수를 만나 전 세계에벌어지고 있는 자원 확보 전쟁 속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물었다.

물량 안정적 확보, 가격 변동성 완충해야

박호정 고려대 교수는 원자재거래시장을 민간에 개방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최영재 기자

박호정 고려대 교수는 원자재거래시장을 민간에 개방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최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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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재 가격 급등에 전 세계가 떨고 있다.
“지난 40여 년간 자유무역주의가 표준으로 자리 잡으면서 전 세계가 한 나라처럼 연결됐다. 에너지와 광물, 농산물 등 원자재 시장에선 국경이 사라졌다. 지구 반대편 분쟁이나 자연재해가 한국에 영향을 주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경제적으로는 밀접히 연결돼 있는데 최근 수년간 보호무역주의가 부상하면서 갈등이 잦아졌다. 정치적 환경이 바뀐 것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촉발된 원자재 가격 급등도 이런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대비할 수 있었다는 뜻인가.
“원자재 확보는 한 나라의 경제는 물론 안보와도 직결된 문제다. 대비를 할 수 있느냐를 따질 문제가 아니라 대비해야만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원자재를 확보했다고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격이 중요하다. 예컨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국제 유가가 급등한 상황에서 원유를 배럴당 120달러에서 가져왔다고 하자. 가격 급등의 충격을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다.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한국 경제는 인플레이션과 수출 기업 경쟁력 악화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물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해 가격 변동성을 완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선 해외 자원 개발에 적극적일 필요가 있다.”
정부가 나서야 하나.
“정부와 공기업이 주도하는 해외 자원 확보가 정답은 아니다. 자원 공기업의 해외 자원 개발 투자 손실이 문제가 됐던 게 불과 10년 전 일이다. 당시 자원을 확보하기는 했다. 중국(30%)이나 프랑스(103%)에 비해 미흡하지만 2012년 국내 석유·가스 자원 개발률은 13.8%로 2년 만에 3%포인트 높아졌다. 최근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니 정부에선 공기업이 보유한 해외 광산 매각을 중단시켰다. 매각을 강행하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과거 방식으로 회귀한다는 신호가 되선 안 된다.”
당시 어떤 문제가 있었나.
“해외 자원 개발 사업에 나설 때 공기업이 주도하고 민간 기업이 컨소시엄 형태로 참여했다. 자원 공기업이 1차적으로 위험을 부담하는 구조다. 이런 구조에서는 민간 기업에 해외 자원 개발 전문성이 쌓이지 않는다. 모든 협상은 종합 예술이라 불릴 만큼 다양한 요소에 승부가 갈린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선 민간 기업의 역할이 중요한데, 민간 기업들이 네트워크와 경험을 쌓은 전문가를 육성해야 한다. 가까운 일본만 하더라도 1990년대까지 정부 주도로 자원 개발에 나서며 비슷한 시행착오를 겪다 민간 기업 중심의 해외 자원 개발 모델로 전환해 성과를 내고 있다.”
다른 나라는 어떤가.
“구체적으로는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큰 틀에서는 투트랙으로 대응하는 게 일반적이다. 호주나 유럽 등 자원 부국을 상대로는 공공 부문과 민간 기업이 컨소시엄을 꾸려 입찰에 참여한다. 반면 아프리카, 남미, 동유럽 등지에서는 대체로 민간 기업이 활동하고 있다. 정치가 불안한 나라에서는 민간 기업의 네트워크 등이 더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금·수소 등 묶은 거래소, 동북아 허브로

왜 그런가.
“존 퍼킨스가 쓴 『경제저격수의 고백』을 보면 이해하기 쉽다. 미국인 존 퍼킨스는 공식적으로는 컨설팅 회사 직원인데, 자원 확보를 위해 개발도상국에 가서 유력 정치인들의 개인적 고민 등을 들어주기도 한다. 이런 일은 민간 기업이 현지에 진출해 오랫동안 관계를 맺고 신뢰를 쌓아야만 가능한 일이다. 무상원조(ODA) 등을 앞세운다고 해도 정부가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우리도 민간 기업을 중심으로 현지에 진출해 꾸준히 인맥을 쌓고 신뢰를 형성해야 성과를 낼 수 있다. 어려운 일이지만, 이미 주요 나라가 이들 나라에 진출해 궂은일도 마다 하지 않고 준비하고 있다.”
그래도 정부 역할이 가장 중요해 보인다.
“당연하다. 정부가 할 일 중 가장 시급한 것은 원자재 거래 시장을 개방하고 거래소를 통해 활성화하는 것이다. 거래 시장이 활성화돼야 민간 기업이 해외 자원 개발에 적극 나설 것이다. 예컨대 지금은 A라는 기업이 액화천연가스(LNG)를 해외에서 개발해 가져와도 국내에서는 판매가 불가능하다. 벙커링(외국 국적 선박·항공기용 연료공급) 등 일부 예외가 있긴 하지만 원칙적으론 자가 소비용으로만 들여올 수 있다. B기업은 천연가스가 부족해 A기업의 것을 사서 쓰고 싶지만 현재로서는 한국가스공사가 들여오는 물량만 받아 써야 한다. 누구라도 유연하게 거래할 수 있는 시장이 열려야 민간 기업도 해외 자원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겠나.”
거래소는 어떤 형태여야 하나.
“다양한 원자재를 한 곳에서 거래할 수 있는 상품거래소를 만들어야 한다. 금이나 전력, 탄소배출권 같은 일부 품목은 이미 거래소가 있다. 수소 거래소도 따로 만든다고 한다. 이래선 효과가 반감된다. 이를 묶어 상품거래소를 만들고, 동북아시아 지역을 대표하는 시장으로 키워야 한다. 울산시 북항 일대에 동북아 오일·가스 허브 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니 저장 인프라는 곧 갖춰진다. 여기에 거래 기능만 추가하면 된다. 위치는 문제가 안된다. 어디가 됐든 국내에 상품거래소를 만들고 민간 기업과 시장의 역량을 키워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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