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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붙은 신자원민족주의]공급망·전쟁 리스크 겹쳐 ‘자원 무기화’ 가속, 90% 수입 한국 초비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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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1호 08면

SPECIAL REPORT 

러시아 브라스크의 알루미늄 제련소. 우크라이나 사태로 현지 원자재 공급망 불안이 가중된 상태다. [타스=연합뉴스]

러시아 브라스크의 알루미늄 제련소. 우크라이나 사태로 현지 원자재 공급망 불안이 가중된 상태다. [타스=연합뉴스]

한국 경제가 생산원가 상승 압박에 따른 수익성 악화 우려에 신음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원재료 구매에만 사상 처음 100조원에 가까운 돈(95조6254억원)을 썼다. 전년인 2020년(81조7921억원)보다 17%가량 급등한 수치다. 제품 생산량이 증가한 때문이 아니다. ‘가전의 꽃’인 TV 등 영상기기 생산 실적은 외려 전년보다 8% 넘게 감소했다. 삼성전자 측은 “디스플레이 패널을 비롯해 주요 제품 원재료인 철판과 플라스틱, 구리 등의 단가가 예년보다 많이 올랐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올해는 더 오르고 있는 상황이고 앞으로도 당분간 나아질 것으로 보이지 않아 고민이 깊다. 다른 기업들도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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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리튬 개발 국유화 선언

인천신항에서 컨테이너 선적 작업이 한창이다. 지난달 한국의 수입물가지수는 137.34로 2012년 9월(138.26) 이후 9년 5개월 만에 최고치였다. [연합뉴스]

인천신항에서 컨테이너 선적 작업이 한창이다. 지난달 한국의 수입물가지수는 137.34로 2012년 9월(138.26) 이후 9년 5개월 만에 최고치였다. [연합뉴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원재료 수입 물가는 전년 대비 42.3% 올라 금융위기가 터진 2008년(54.6%) 이후 13년 만에 최고 상승률을 기록했다. 철광석(47.5%)과 알루미늄(45.5%), 플라스틱(23.9%), 구리(15.1%) 등의 가격이 일제히 껑충 뛰었다. 제조업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높지만 그 제조업에 드는 에너지·광물 등 핵심 자원 수입 의존도가 90%에 달하는 ‘자원 빈국’ 한국으로선 치명적이다. 그런데 코로나19 팬데믹이 글로벌 공급망 붕괴 등을 유발, 자원 가격 인상을 한창 부추긴 상황에서 최근 들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쟁까지 터진 것이다.

한국은 네온·크립톤 등 일부의 반도체용 소재를 제외하면 러시아나 우크라이나에서 수입하는 자원은 많지 않아 직접적인 타격이 우려되는 상황은 아니다. 유럽 전역을 뒤흔들고 있는 러시아산 천연가스 대란도 한국엔 영향이 크지 않다. 러시아산 천연가스 의존도가 45%를 넘는 유럽연합(EU)과 달리 한국은 5% 정도에 그친다. 하지만 두 나라가 자원 창고 문을 잠그자, 차제에 다른 ‘자원 부국’들이 자국 자원을 무기화하는 행보를 가속화하면서 글로벌 원자재 시장의 수급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한국이 필요로 하는 자원 다수가 포함돼 있다. 이 때문에 산업계에서는 우크라이나 사태를 계기로 신(新)자원민족주의가 부활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그래픽=이정권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gaga@joongang.co.kr

중남미의 ‘자원 부국’ 멕시코는 지난달 리튬 개발을 국유화하겠다고 선언했다. 민간 기업들이 아닌 정부가 개발 주도권을 쥐면 수출량도 자국에 득이 되는 방향으로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백색의 금’으로 불리는 리튬은 한국의 주력 수출 품목인 전기차용 배터리 제조에 필요한 핵심 재료다. 가뜩이나 세계적인 탈(脫)탄소 붐으로 전기차 수요가 폭증한 상황에서 이런 행보에 자극받은 다른 나라까지 공급 조절에 나설 경우 가격이 더 오를 게 뻔하다. 현재 세계 리튬 시장은 호주·칠레·중국 세 나라가 80% 넘게 장악했고 매장량은 중남미(60%)에 가장 많다. 멕시코 정부는 칠레 외에도 아르헨티나·볼리비아 등 같은 중남미 국가와 공동으로 리튬 관련 이익을 극대화하겠다는 계획이다.

아시아의 자원 부국 인도네시아는 올해 초 석탄에 이어 알루미늄의 원재료인 보크사이트 수출을 전면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내년부터는 구리 원광(제련하지 않은 광석) 수출도 금지하겠다고 했다. 앞서 인도네시아는 2019년 말 세계 공급량의 25%를 차지한 니켈 원광 수출을 전면 중단한 바 있다. 당시 세계적으로 니켈 가격이 급등해 각국 기업들이 발을 동동 구르면서 인도네시아에 공장을 짓기도 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이처럼 자원 수출 통제와 제련소 건설 등에서 얻는 경제적 이득이 수출로 인한 이득보다 크다고 판단했다. 단순한 원자재 수출국에서 벗어나 고부가가치 창출에 나선 것이다.

중국, 희토류 수출 제한 근거 마련  

서울의 한 엔진오일 판매 전문점. 최근 국제 유가와 원자재 가격 급등의 영향으로 관련 제품 가격도 오르고 있다. [뉴스1]

서울의 한 엔진오일 판매 전문점. 최근 국제 유가와 원자재 가격 급등의 영향으로 관련 제품 가격도 오르고 있다. [뉴스1]

이는 신흥국들이 최근 미국발 통화 긴축 등으로 한층 커진 경기 불확실성에 그만큼 강한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으로도 풀이된다. ‘테이퍼 텐트럼’(taper tantrum·긴축 발작)이란 용어가 나올 만큼 선진국의 양적 완화·축소는 신흥국의 통화 가치 약세와 증시 위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팬데믹 이후 우크라이나 사태까지 겹치면서 국제적인 원자재 수급 불균형 문제가 장기화할 분위기라 ‘자원 안보’ 중요성이 커졌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인도네시아가 지난해 석탄 가격 급등 이후 자국 내 공급 부족에 직면하면서 전력난을 겪은 것도 자원 안보의 필요성을 절감한 계기였을 것”으로 해석했다.

그래픽=이정권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gaga@joongang.co.kr

지난 2년간 호주와 한바탕 석탄 전쟁을 치르면서 역시 전력난으로 자원 부국의 체면을 구긴 중국도 자원의 무기화에 여념이 없다. 특히 자원을 미국과의 패권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필수 열쇠로 보고 있어 강경한 기조를 유지할 공산이 크다. 중국은 ‘21세기 최고 전략자원’이란 별칭이 붙은 희토류(17가지 희소금속)의 수출을 제한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법(수출통제법)을 2020년 말 시행했다. 지난해 말엔 자국 내 5개 희토류 관련 기업·기관을 통폐합해 초대형 국영 기업인 ‘중국희토집단(그룹)유한공사’를 출범시켰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현지 기업 간 내부 경쟁이 줄어 희토류에 대한 중국 정부의 가격 결정권이 강화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중국은 세계 희토류 생산량의 60.6%를 차지해 이미 미국(15.5%)을 크게 앞지르고 있다. 이에 미국은 제조업에서 상당량의 중국산 희토류를 수입해왔다. 중국으로부터 2020년 기준 일본(40.2%) 다음으로 많은 35.2%의 희토류를 수입해 반도체 등의 제조에 투입 중인 한국도 민감할 수밖에 없다.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희토류의 하나인 네오디뮴의 경우 국내 의료업에서 중국산 의존도가 86%에 달한다. 이외에도 자동차 제조에 필요한 마그네슘(100%), 배터리에 들어가는 전구체(93%), 반도체에 투입되는 산화텅스텐(86%) 등 중국산 의존도가 절대적으로 높은 원자재가 부지기수다.

이런 분위기 속에 주요 자원 가격은 지난해에 이어 올 들어서도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영국 런던금속거래소(LME)에 따르면 2020년 봄 t당 5000달러대였던 구리 현물 가격은 현재 1만 달러대로 2년 만에 2배가 됐다. 각각 1만 달러대였던 니켈과 주석의 현물 가격은 나란히 4만 달러대로 4배가 됐다. 역시 급등 중인 국제 유가 등 주요 에너지 가격까지 고려하면 산업계는 세계 경기 불확실성 고조에 따른 소비 위축 우려 상황에다 생산원가 상승이라는 이중고를 겪게 된 셈이다. 김기봉 국제금융센터 책임연구원은 “우크라이나 사태 등을 계기로 자원을 통한 국수주의가 과거처럼 심해지면서 향후 자원 관련 분쟁도 국제적으로 빈번해질 것”으로 우려했다.

민간 앞장서고 정부서 뒷받침해야

이 때문에 일각에선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대책으로 기업들의 수입선 다변화를 강조하고 있지만, 단순히 수입선 수를 늘리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분석이다. 에너지·광물 자원 자체가 매장량이 국가별로 한정돼 수입선을 다양하게 갖기부터 쉽지 않은 데다, 지난해 요소수 대란 때의 경우에서 보듯 수입선이 많다고 꼭 안정적인 공급으로 직결되는 건 아닌 때문이다. 유정호 부경대 국제통상학부 교수는 “한국의 요소수 수입국은 중국 외에도 9~10개국으로 일본(7~8개국)보다 많았는데 당시 공급난 해결이 어려웠다”며 “이는 중국을 대체할 만한 핵심 공급국 단 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래픽=이정권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gaga@joongang.co.kr

예컨대 일본은 중국 외에 말레이시아로부터 요소수 대란 이전에도 비중 있게 요소수를 수입해왔다(지난해 1월 중국 50%대, 말레이시아 30%대). 이렇게 평소 뚫어놨던 말레이시아 공급망을 요소수 대란 직후에도 어렵지 않게 늘려 잡으면서(지난해 11월 말레이시아 80%대, 중국 6~7%)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는 분석이다. 한국은 이전까지 중국산 요소수 의존도가 90%를 넘었다가 대란 직후에야 베트남산 비중을 높였다. 그런데 이렇게 급하게 기존에 네트워크가 약했던 공급망을 활용하면 가격 조건 면에서 또는 장기적 관점에서 추가적인 어려움이 따를 공산이 크다.

이에 대해 유 교수는 “핵심 공급망이 2개라고 해서 충분한 숫자란 얘기는 아니다”면서 “정부 차원에서 국가적으로 중요한 자원별로 수입국들을 면밀히 조사해 핵심 공급망 역할을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몇 곳을 우선적으로 확보하고, 이후 가능하면 (핵심 공급국을 제외한) 수입선 다변화를 검토하는 게 최선책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전문가들은 한국이 해외 자원 개발 인프라 구축에 힘쓰는 한편, 제조업의 원자재 사용량 저감 기술 개발과 폐자원 재활용 시스템 구축 등 노력을 더해 리스크 최소화를 도모할 수 있다고 분석한다.

지난달 정부 주도로 공식 출범한 글로벌공급망분석센터의 수장을 맡은 조상현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공급망 분석은 수급 상황뿐 아니라 국가별 정책 변화 외에도 돌발 변수까지 고려해야 해서 애로점이 적잖다”며 “결국 해외 자원 개발에 더 적극 나서야 근본적인 공급망 개선이 가능해진다”고 말했다. 한국의 해외 자원 개발은 2010년대 중반 이후 수익 등의 사업성 악화, 관련 분야 공기업의 구조조정과 신규 투자 중단 등으로 지지부진해진 상태다. 다만 정부가 100% 주도하는 해외 자원 개발엔 정부별로 한정된 임기 등으로 한계가 있는 만큼, 민간 기업이 역량을 키워 앞장서고 정부는 이를 뒷받침해주는 식의 전략이 효과적이란 분석도 전문가들은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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