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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양구의 퍼스펙티브

푸틴의 단기전 실패, 장기전으로 가면 최악의 사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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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우크라이나 전쟁과 우리의 대응

지난 9일 우크라이나 남부의 항구 도시 마리우폴의 한 병원 산부인과에서 부상한 임신부를 사람들이 급히 옮기고 있다. 러시아군의 포격으로 이 병원에서 출산 중이던 임신부와 신생아는 끝내 숨졌다. [AP=연합뉴스]

지난 9일 우크라이나 남부의 항구 도시 마리우폴의 한 병원 산부인과에서 부상한 임신부를 사람들이 급히 옮기고 있다. 러시아군의 포격으로 이 병원에서 출산 중이던 임신부와 신생아는 끝내 숨졌다. [AP=연합뉴스]

미국 외교계의 거두였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거대한 체스판(The Grand Chessboard)』에서 “우크라이나 없는 러시아는 제국으로 부상할 수 없다”고 진단했다. 이 말은 우크라이나가 서방 세계로 들어오면 그만큼 국제정치 안보 차원에서 자유민주주의 세계에 유리하다는 의미다.

우크라이나는 서방이나 러시아나  양보할 수 없는 중요한 ‘중심축 국가’(Pivot state)다. 세계적 지정학 전략가인 피터 자이한은 『셰일 혁명과 미국 없는 세계』에서 미국이 고립주의로 회귀하면 전 세계적으로 3대 전쟁이 발발할 수 있으며 그 첫 무대가 우크라이나 및 발틱3국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아직 미국이 고립주의로 회귀하지 않았는데 러시아의 굴기는 이미 시작됐다.

기습 도발한 푸틴의 의도와 달리 우크라이나 결사 항전
비옥한 평야지대에서 늪으로 바뀌는 3월 하순이 분수령
나토 등 서방의 군사 지원 확대, 중국의 중재 여부 주목
윤석열 정부 출범하면 유라시아 전략 대범하게 새로 짜야

러시아가 지난달 24일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전면전을 시작한 지 20일이 돼간다. 당초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3~4일 이내에 승리를 자신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국민의 영웅적인 저항과 서방의 지원, 국제 여론 등으로 전쟁이 길어지고 있다.

거론되는 시나리오 5가지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키예프)를 함락하기 위한 총공세를 펴고 있다. 러시아는 유엔의 권고안도 듣지 않고 국제사회 여론도 무시한다. 오히려 푸틴 대통령은 끝까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목적을 관철할 태세여서 국제사회의 공분과 공포를 자아내고 있다. 전 세계 50여 개국 4만여 국제자원군이 자유민주주의와 우크라이나를 지키기 위해 키이우 사수에 합류하고 있어 격전이 예상된다.

미국·유럽연합(EU)·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러시아에 초강력 경제제재를 하고 있다. 러시아의 전비는 하루 200억~250억 달러나 된다고 한다. 급기야 러시아의 국가 부도 위기 가능성이 거론될 정도다. 러시아는 핵무기 사용 가능성 시사, 우크라이나 원전 폭격 및 점거, 민간인 대상 무차별 공격 감행 등 더 잔혹하게 나오고 있다. 제3차 세계대전의 우려와 공포도 커지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세 차례 이상 실무 회담에 이어 지난 11일 외교부 장관 회담을 개최했으나 아직은 딱히 해결책이 보이지 않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터진 가장 큰 전쟁이 언제 어떻게 결말날지에 대해 다섯 가지 시나리오가 거론된다.

첫째, 단기전이다. 러시아가 공군력 등을 총동원해 키이우를 함락해 친러 괴뢰정권을 수립하는 시나리오다. 둘째, 장기전이다. 러시아군의 보급 차질과 사기 저하 와중에 우크라이나군의 결사 항전으로 전쟁이 수년간 지속하는 시나리오다. 셋째, 확전이다. 몰도바·조지아 등 비NATO 회원국 또는 발틱3국 등 NATO 회원국을 러시아가 추가로 침공하는 시나리오다. 상호방위조약에 따라 NATO가 참전하고 ‘유럽 전쟁’으로 비화하는 시나리오다.

넷째, 외교적 해결이다. 러시아군의 인명 피해가 커지고 반전 여론이 높아지면서 중국이 외교적 중재에 나서는 시나리오다. 다섯째, 푸틴 정권의  축출이다. 러시아군 사상자가 증가하고 경제 제재 여파로 엘리트층이 등을 돌려 민중봉기나 쿠데타가 일어나는 시나리오다. 국제문제 전문가들은 대체로 장기전 시나리오 가능성을 가장 높게 본다. 하지만 장기전은 모두에게 손실이 커서 가장 피해야 할 시나리오다.

우크라이나는 해마다 3월 하순이 되면 ‘라스푸티차(Rasputitsa)’라는 기상 변화로 흑토지대 평야가 늪지로 변해 전차와 탱크의 이동이 어렵다. 우크라이 정부도 러시아가 요구하는 NATO 가입과 영토 문제에 대해 타협 여지를 시사했다. 제반 사정에 비춰 보면 대규모 전쟁은 대략 3월 하순 전에 종료될 것으로 조심스럽게 전망해 본다.

신냉전 구도로 흐를 가능성도

그러나 이번 사태를 가늠하는 몇 가지 변수가 앞으로의 향배를 좌우할 것이다. 첫째, 푸틴 대통령의 독특한 역사관과 세계관, 그리고 합리적 의사결정 여부다. 푸틴 대통령은 지금 북한의 ‘벼랑 끝 전술’을 재현하는 듯하다. 둘째, 키이우 사수를 포함한 우크라이나의 저항 지속 여부와 러시아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느냐가 관건이다.

셋째, 서방의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 강도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것이다. 미국과 NATO는 아직 군사적 개입에 선을 긋고 있다. 그러나 다른 우발 상황이 발생하면 NATO의 직접 참전 여부가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다. 넷째, 중국의 입장과 역할이다. 중국이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서거나 러시아 경제 제재에 동참할지도 중요하다. 중국과 러시아가 밀착하면 신냉전 구도로 갈 우려도 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어떤 대응을 해야 할까. 다행히 우리 정부 차원에서도 유엔의 러시아 권고안과 경제제재에 동참했다. 우크라이나에 긴급 자금을 지원하고 정상끼리도 통화했다. 민간 차원에서도 우크라이나 지원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지난 6일에는 기독교 차원에서 유엔난민기구(UNHCR) 및 세계식량계획(WFP)과 공동으로 우크라이나 지원 캠페인 행사를 열었는데 6000여 명이 참여했다. 삼성전자 등 한국 기업들이 후원에 나서고 일반 국민의 모금 참여 등으로  우크라이나인들에게 큰 위로와 감동을 주고 있다. 우크라이 문제는 우리 문제이기도 하기에 우리는 지원을 계속해야 한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우리에게 각성과 성찰을 하게 했다. 그동안 우리는 동맹이나 우방을 소홀히 했다. 이념·진영 갈등도 심했다. 외부의 도전을 직시하기보다 국내 문제에 함몰되기도 했다. 북핵 문제나 종전선언 등에 대한 낭만적 기대나 중국·러시아의 권위주의에 대한 선의의 기대 등 안보에 대한 모럴해저드가 팽배했다. 특히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인류 보편적 가치에 대한 정체성 측면에서 다소 모호하지 않았는지 성찰해야 한다.

우크라이나를 지원할 이유는 또 있다. 미래에 대한 안보 보험 차원이다. 우크라이나와 유사한 안보 위기는 한반도에서도 언제든지 터질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평화는  완전한 평화가 아니라 매우 불완전한 평화다. 특히 핵무기를 안고 있는 북한이나 공산주의 중국과 권위주의 러시아가 있는 한반도는 결코 평화로운 지역이 아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책임도 있다.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의 승패는 자유민주주의를 러시아·중국·북한 등으로 확산하느냐, 아니면 권위주의가 유라시아 전역으로 퍼지느냐 여부를 좌우하는 중대한 기로다. 물론 적절히 균형 잡을 필요는 있다. 러시아를 지나치게 고립시키거나 러시아 국민을 적대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러시아가 성숙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전환되고 경제 발전을 통해 독일 같은 강국으로 거듭나서 중국의  변화를 촉진하고 중국의 굴기를  견제하는 긍정적인 균형자 역할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지난 9일 대선에서 탄생한 윤석열 당선인의 새 정부가 5월 10일 출범하면 유라시아 외교의 중요성을 고려해 대범하고 창의적인 전략의 새판을 짜야 할 것이다. 첫째, 자유민주주의와 인류 보편적 가치에 기반한 가치외교를 견지해야 한다. 둘째, 유라시아를 상대로 외교 전략을 새롭게 수립하고 이를 추진하기 위해 초당적인 외교를 추진해야 한다.

냉혹한 국제현실 직시해야

셋째, 한·미 동맹 강화, 한·일 관계 회복은 기본으로 하고 미들파워 네트워크를 강화해야 한다. 미들파워 네트워크를  강화해 강대국 중심의 지정학 질서가 흔들리지 않도록  견제와 균형자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 넷째, 안보 위협 요소를 차단하는 예방외교와 위기관리를 강화해야 한다. 다섯째, 국제정치의 냉혹함과 잔인함, 우리가 처한 안보 현실을 직시하고 소탐대실하지 말아야 한다.

대한민국만큼 글로벌 의존도가 높은 나라도 없다. 가장 글로벌 의존도가 높은 나라임에도 역설적으로 글로벌 역량 및 글로벌 지수는 매우 낮다. 필자는 우크라이나 대사 재임 시절 겸임국인 몰도바를 자주 방문했다. 역사학자인 몰도바 자유대학 총장은 한국을 15세기 대항해시대를 연  포르투갈에 비유했다. 포르투갈은 인구도 많지 않고 땅도 크지 않지만 글로벌 전략을 추진해 세계적 강국으로 도약했다. 우리의 미래는 글로벌에 달려 있다. 우리도 포르투갈·스페인·영국·프랑스 같은  글로벌 파워가 될 수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계기로 우리가 미들파워 파트너들과 함께 유엔의 지속가능발전목표(SDGs)를 구성하는 5Ps(peace prosperity planet people partnership)를 선도하면 유라시아 역사를 새로 쓰는 세기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평화와 번영, 한반도의 평화 통일, 동북아시아와 유라시아의 평화와 번영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이 축적해온 역량을 총동원한다면 지정학 위기가 역사 발전과 문명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로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이양구 전 우크라이나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