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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주호의 퍼스펙티브

대학을 살리고 싶은가, 교육부 통제부터 풀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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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디지털 전환기, 새 정부의 교육정책 

이주호 케이정책플랫폼 이사장·전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이주호 케이정책플랫폼 이사장·전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정부 개혁의 시간이 시작됐다. 대선 동안 대통령 당선인이 공약한 정책을 실천하려면 인수위원회에서 정부 개혁의 시동을 걸어야 한다. 약속한 정책을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어 디자인하고 집행하려면 정부의 일하는 방식, 더 나아가서 정부의 기능·역할·조직까지 모두 바꿔야 한다.

그러나 인수위 출범 때부터 정부 개혁에 대한 강한 반발과 저지가 시작될 것이다. 인수위에서 각 부처가 권한을 하나라도 더 지키고 하나라도 더 늘리기 위하여 사력을 다하여 로비하는 것은 잘 알려진 관행이다. 관료가 개혁의 적이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관료가 자기가 속한 부처의 이익과 조직의 생존에만 집착하여 국민을 위한 긍정적 변화를 외면하거나 거부하는 관료주의가 문제다. 관료주의의 폐해는 정치인이 나라 곳간을 비우는 정책을 남발하는 포퓰리즘만큼이나 심각하다.

스탠퍼드대·UC버클리는 실리콘밸리 혁신생태계 이끌어
한국 대학은 교육부의 관료적 통제로 혁신 에너지 상실
현 상황 방치하면 4차 산업혁명 주도권 회복할 수 없어
대학 연구·창업과 과기부 지원업무 더 활발히 연계해야

정부 개혁이 제대로 추진되지 못한 원인에는 정치 갈등도 큰 몫을 차지한다. 그동안 정부 개혁에 대하여 국민적 합의 도출이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정부의 크기에 대해서는 보수의 작은 정부론과 진보의 큰 정부론이 대립했고, 정부의 역할에 대해서도 정부가 경제 성장에 더 치중할지 아니면 사회 형평성 제고에 더 중점을 둬야 할지 이견을 좁히기 힘들었다. 그러나 최근 국내외적으로 바람직한 정부 개혁의 방향에 대하여 합의가 형성되고 있다. 바로 일 잘하는 정부이다.

미국 정부, 혁신과 첨단기술에 적극 투자

퍼스펙티브

퍼스펙티브

일 잘하는 정부는 크기가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에 비교적 잘 대처한 국가 중에는 북유럽 국가와 같이 큰 정부도 있지만, 홍콩과 같이 작은 정부도 있다. 정부가 얼마나 일을 잘하느냐는 정부의 크기와는 상관이 없다는 점을 세계가 함께 경험하였다. 그리고 일 잘하는 정부는 경제성장을 위해서만 아니라 사회의 포용성을 높이기 위하여도 필수적이라는 점을 국제기구들이 하나같이 강조하고 있다. 새로 출범하는 정부부터라도 경제성장과 사회 형평성을 동시에 강화하는 일을 잘해낼 수 있는 정부를 만드는 개혁에 여야가 힘을 합쳐주기를 기대한다.

어떻게 일 잘하는 정부를 만들까? 시장 지상주의 혹은 관료 만능주의의 극단에 치우치지 말고, 혁신적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 마리아나 마추카토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 교수는 정부는 관료적이고 시장은 혁신적이라는 이분법을 비판하고 기업가형 정부를 제안한다. 미국이 4차 산업혁명 혹은 디지털 대전환을 선도할 수 있는 것은 정부가 혁신과 첨단기술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미국의 국방고등연구기획원(DARPA), 국립과학재단(NSF), 국립보건원(NIH) 등의 정부 기관들이 제4차 산업혁명의 진원지라고 할 만큼 많은 고위험 혁신을 주도하는 동시에 민간에는 혁신에 따른 고위험을 분담하여 주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는 미국의 혁신과 과학기술에 대한 적극적인 정부의 역할이 시장 친화적 혁신생태계의 기반 위에서 큰 효과를 보고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가 과거 빠른 경제성장을 통하여 다른 나라를 추격할 때는 정부의 주도적 역할이 결정적이었지만, 더는 정부의 지휘와 통제 중심의 성장 모델로는 경제의 지속적 성장과 사회의 격차 해소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특히 우리가 4차 산업혁명과 디지털 대전환 시대의 선도자가 되려면 정부는 민간의 주도와 활력을 최대한 존중해야 한다. 정부는 혁신과 첨단기술에 적극적으로 투자하는 동시에, 대학과 연구기관에 최대한 자율을 허용하고, 기업에 대한 간섭과 직접 지원을 과감하게 축소해야 한다.

대학의 전문가 역량, 교육부 웃돌아

정부 개혁의 주요 방향은 정부가 직접적인 개입보다 혁신생태계를 조성하는 역할에 집중하는 것이다. 혁신생태계는 기업가·연구자·투자가·공무원·시민 등이 꾸준히 협력하고 소통하고 경쟁하면서 기존 과학의 한계를 뛰어넘는 고위험·고부가가치의 연구개발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업 모델, 플랫폼, 상품, 산업은 물론이고 이에 상응한 정부 규제의 혁신도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체계이다.

또한 복지·노동·보건 등 주요 사회 분야의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혁신과 전환이 요구되므로 혁신생태계의 폭을 넓혀서 사회 분야까지도 포함해야 한다. 우리가 최고의 혁신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 경제·산업, 사회 등 각 분야의 혁신을 선도하는 인재를 양성할 수 있는 교육의 혁명적 변화도 요구된다. 따라서 다음 정부는 무엇보다도 혁신생태계 조성에 집중해야 한다.

혁신생태계에서는 민간 기업이 당연히 중심 역할을 하지만, 미국 실리콘밸리의 스탠퍼드대나 UC버클리와 같이 혁신생태계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대학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혁신생태계의 허브 역할을 하는 대학이 아직 없다.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대학을 마치 산하 기관처럼 취급하는 교육부의 관료적 통제 때문이다.

만약 윤석열 정부에서도 대학을 교육부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나라는 4차 산업혁명과 디지털 대전환에서 결코 선도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우리 대학이 아직은 자율적 역량과 변화의 의지가 없어서 과감한 대학 자율화가 시기상조라는 의견도 있다. 대학이 정부 통제에 오래 길들면서 대학 자체의 관료주의가 심각하고 변화의 동력이 미미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대학 전체가 보유한 전문가들의 총역량은 교육부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대학을 교육부의 통제 아래 그대로 두고 건강한 혁신생태계를 조성할 수 없다. 따라서 이번 인수위에서 대학을 혁신생태계의 중심지로 만드는 과감한 정부 개혁의 깃발을 올려야 한다.

교육부가 대학 업무 일일이 간섭

이를 위해선 합의와 실천이 쉬운 과제부터 시작하여 다음 정부 내내 꾸준하게 추진해야 한다. 첫째, 우리나라 고등교육법은 교육부 장관이 대학에 대한 포괄적인 지도·감독 권한을 가지고 대학의 주요 학사 운영에 대하여 교육부가 인가하게 되어 있다. 또 사립학교법은 사립대학의 재산 처분까지도 교육부의 승인을 받도록 하고 있다.

선진국 중에서 대학에 대하여 이렇게까지 규제하는 나라는 일본을 제외하고는 찾아볼 수 없다. 더구나 인구 변화로 학생 수가 급감하여 폐교 위기에 몰린 대학이 많아지게 되면 교육부의 강한 규제에 따른 비용도 빠르게 증가할 것이다. 따라서 두 법안을 시급히 전면 개편하여 최소한의 규제만 남기고 네거티브 규제(법률·정책에서 금지한 행위가 아니면 모두 허용) 체제로 바꿔야 한다.

둘째, 교육부가 14년 동안 대학 등록금을 거의 동결 수준으로 통제하는 동시에 정성적 평가와 연계한 재정 지원 사업을 확대하면서, 대학은 교육부의 재정 지원에 더 의존하고 교육부의 통제를 더 받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대학은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기 위한 보고서 작성과 평가 준비에 모든 역량을 집중할 수밖에 없게 돼서 지역사회 혹은 기업과 협력하여 혁신생태계의 중심지로 나설 여유조차 가질 수 없다.

따라서 대학 등록금에 대한 제한적 자율을 허용하는 대신 학생 부담이 늘어나지 않도록 국가장학금을 늘려야 한다. 또 교육부의 대학 단위 지원은 과감하게 축소하는 대신 학생과 교수가 혁신생태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을 늘려야 한다.

대학 입시는 국가교육위원회로 이관

셋째, 대학 입시는 학생의 신뢰 보호 차원에서 현 제도를 당분간 유지하되, 교육부가 아닌 신설된 국가교육위원회가 고교 교육 정상화와 공정성 제고에 부합하면서도 대학의 학생 선발 자율성을 확대하는 방안을 장기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넷째, 대학의 연구·개발, 산학 협력, 창업 지원 등에 대하여 교육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그동안 중첩 규제하면서 대학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재직자나 구직자에게 최첨단 기술을 수시로 학습하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대학의 평생교육이 강조되면서,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대학의 연구·혁신·평생교육에 관하여 통합적으로 지원하도록 부처 기능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대학에 대한 규제를 최소한만 남기고, 대학 단위 교육 재정 지원도 최소화하는 동시에, 대학 입시는 국가교육위원회로 이관하고, 대학의 연구·혁신·평생교육에 관한 기능을 과학기술정보통신부로 통합하게 되면, 교육부의 고등교육정책실을 폐지하고 대학을 총리실로 편제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산업경제정책을 과학기술정책과 대학의 연구·혁신·평생교육 지원 기능과 융합하여, 대학을 포함한 혁신생태계 조성을 포괄적으로 지원하는 통합 부서인 (가칭)과학기술혁신전략부를 신설해야 한다.

이주호 케이정책플랫폼 이사장·전 교육과학기술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