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김태유의 퍼스펙티브

성공하는 대통령의 조건: 공신보다 전문가 등용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4면

정권의 성공 비결

김태유의 퍼스펙티브

김태유의 퍼스펙티브

국가 최고 통치권자는 하늘이 점지한 인물이라고들 한다. 그러니 새 대통령의 당선은 가문의 영광뿐 아니라 그를 도운 정파의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5년마다 한 번씩 나오는 대통령 당선이 모두 국가와 민족의 영광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임기 중 실적에 대한 국민과 역사의 냉정한 평가에 의해서만 판단될 일이기 때문이다.

역대 어느 대통령도 임기 초 국민이 기대한 만큼 임기 말 실적으로 인정받은 경우가 없었다. 문민정부는 83%에 달하는 최고의 지지율로 시작해 6%의 처참한 지지율로 임기를 마쳤다. IMF 외환위기 때문만이 아니다. 역대 대통령 중 임기 말 지지율이 임기 초 대비 반 토막 이하로 떨어지지 않은 전례는 찾아볼 수 없지 않은가. 이처럼 국민의 기대에 실적으로 보답하여 국가와 민족의 영광을 이룬 성공한 정권은 아직 없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세종이 능력·실적에 따라 인재를 발탁할 수 있었던 건
태종이 기득권 가진 권문세족·외척을 숙청해줬기 때문
득표용 공약 개발한 공신, 국정 운영엔 무능하기 쉬워
국정은 정치에 물들지 않은 학자·관료·전문가에 맡겨야

무능한 충신이 정권 망쳐

대통령이라면 그 누구든 애국자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권력욕·명예욕 등 어떤 야심을 가지고 정치를 시작하였든 상관없다. 이제 남은 일은 오직 애국 애족을 실천하여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것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대 대통령들도 당선되기까지 정치 현안에 급급하다 보니 국가 발전 원리에 대한 심층적 이해가 부족할 수 있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선거 및 공약 작업에 참여한 정치인·학자·관료 등을 대거 영입하여 국정의 중심에 전진 배치하는 것이었다. 보수 정권도 그랬고 진보 정권도 그랬다. 그런데 성공한 정권은 없었다. 왜 그랬을까?

정치인(politician)은 물론이지만, 선거에 깊이 참여한 정치교수(polifessor)나 정치관료(policrat)들은 진지하게 국가 발전 원리를 연구하고 실천하는 학자나 관료가 아니기에 십상이다. 현장 경험도 중요하지만, 국가 발전 원리를 모르는 해바라기는 무능할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 득표 전략용으로 선거 공약을 급조하는 능력은 국가 경영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도리어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되고 나서 그 충직한 동지와 당원들을 정책 기관에 등용하다 보면 정작 최고의 인재를 적재적소에 등용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대통령 재임 중 좋은 실적을 낼 수 없었다. 정치적으로는 유능하지만, 정책적으로는 무능한 충신이 정권을 망친 것이다. 이것이 역대 정권이 실패를 반복해온 과정이다. 그렇다면 정권이 성공하는 방법은 없을까? 과거 성공한 정권의 치세(治世)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보자.

공신에 의존한 왕들은 실패해

조선왕조 최고의 성군 세종대왕의 치적을 살펴보자. 훈민정음 창제, 4군 6진 개척, 대마도 정벌, 『농사직설』간행, 과학기술 진흥, 집현전 확대 등 모든 방면에 걸쳐서 엄청난 업적을 남겼다. 이는 세종이 오직 능력과 실적에 따라 인재를 발탁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세종은 본인의 세자 책봉에 반대한 황희와 장인 심온을 무고(誣告)한 유정현을 영의정으로 삼았고, 출신이 미천함에도 기술 분야에 박자청·장영실을, 군사 분야에 윤득홍·송희미를 고위직에 발탁했다. 또 농업에 정초, 천문에 이순재, 음악에 박연 등 최고 전문가를 적재적소에 등용하였다. 세종의 용인술을 면밀히 분석해보면 충성을 다하는 정치관료보다는 일 잘하는 전문관료(bureaucrat)를, 그중에서도 기술관료(technocrat)를 적극적으로 기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500년 만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성공한 지도자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그렇다면 평범한 지도자의 용인술은 어떨까? 통상 힘없는 기술 관료보다는 힘 있는 행정 관료를, 그리고 더 힘센 정치인을 우선적으로 등용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정권 창출에 헌신적으로 기여한 공신들에 대한 논공행상은 정권 안정의 기반이기 때문이다. 과거 절대왕조 시절에는 공신록에 따라 등급별로 신분(명예)과 관직(권력)과 재산(토지·노비 등)을 하사하였다.

공신(功臣)은 정권을 세우는데 유능한 사람일 뿐 국가 경영 능력이 검증된 사람은 아니다. 이것은 자동차나 비행기를 잘 만드는 엔지니어가 훌륭한 자동차 경주자이거나 조종사가 아닌 것과 같다. 그렇다고 공신들에게 관직을 주지 않으면 불만이 쌓여서 이괄의 난 같은 반란이 일어나곤 한다. 결국 ‘비겁한 지도자’는 공신들의 반발이 무서워서, ‘무식한 지도자’는 정권 창출 능력과 국가 경영 능력을 구별할 줄 몰라서, 그리고 ‘소인배 지도자’는 정권 창출의 공로와 충성에 대한 마음의 빚 때문에 공신들을 대거 등용하고 말았다. 그리고 실패한 무능한 지도자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태종의 공신 제거와 세종의 태평성세

정몽주·정도전의 척살과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후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에게는 감히 도전을 꿈꿀만한 세력조차 없었다. 그런데 그는 공신들과 처남 민 씨 4형제를 모두 제거하고 세종의 처가 집안을 멸문시키는 등 권문세족과 외척의 씨를 말렸다. 태종의 토사구팽(兎死狗烹)의 냉혹함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분명한 것은 성공한 왕조의 태평성세 직전에는 예외 없이 개국공신을 척결한 냉혹한 지도자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한(漢) 고조 유방, 명(明) 태조 주원장 등의 공신 척결 규모나 잔혹함은 태종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목숨을 걸고 함께 나라를 세운 충성스런 공신의 무자비한 숙청과 태평성세 사이에는 도대체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 것일까?

조선왕조 27명의 왕 중에 세종만큼 훌륭한 왕이 왜 더는 배출되지 않았을까? 설혹 자질이 우수한 왕이 또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태평성세를 열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앞서 공신과 외척을 척결해줄 태종 같은 선왕(先王)이 없었다면 말이다. 세종 같은 용인술로 적재적소에 최고의 전문가를 보임하려 해도 기득권을 가진 공신 외척 등 권문세가에 밀려 국정 혼란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 말 세도정치의 폐해로 미루어볼 때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결국 태종의 토사구팽이 수신(修身) 측면에서는 악덕(惡德)일지 몰라도 치국(治國) 측면에서는 미덕(美德)이고 세종대의 태평성세를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더는 사냥할 토끼가 없어지고 나면 사냥개가 가축과 주인을 공격할 것은 뻔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성공한 지도자의 고독한 결단

태종의 결단과 태평성세의 비밀, 그것은 국가 권력을 쟁취하는 정치(政治)와, 국가 권력을 행사하는 정책(政策)을 철저히 분리하는 것이다. 정치는 명분이다. 그럴듯한 명분은 국민의 기대를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기대’는 선거에서 표심으로 반영된다. 표를 몰아 정권을 잡는 것이 바로 정치이다. 그래서 당선과 집권은 정치적 성공이다. 집권 세력은 선거 공신들을 대거 등용하여 선거 공약을 실행에 옮긴다. 그러나 공신들은 선거 잘하는 정치 전문가이지 국가 경영을 잘하는 정책 전문가는 아니다. 정치교수도 국가 발전 원리를 제대로 연구한 학자는 아니다. 게다가 선거 공약 중에도 당장 표가 되는 포퓰리즘 공약이 들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정권은 국가 경제적 실패를 피할 수 없었다. 그러면 국민의 기대는 곧 실망으로 돌변한다. 임기 초 고공 행진하던 지지율이 임기 말 바닥을 치면 민심이 등을 돌리고 정권 재창출에서도 실패하게 된다. 그래서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 정권 교체가 가장 중요한 선거 구호가 되었다. 심지어 같은 보수 혹은 같은 진보끼리조차도 정권 교체를 강조하며 민심에 호소해왔다.

성공하는 대통령이라면 태종의 결단력과 세종의 용인술을 함께 갖추어야 한다. 국가 권력을 쟁취하는 정치가 이념 지향적이라면 국가 권력을 행사하는 정책은 가치 중립적이다. 정치가 정파의 목표라면 정책은 국민의 목표이다. 정치는 선거 공신에게 모두 맡겨도 좋다. 그러나 정책은 정치에 물들지 않은 학자와 관료 그리고 해당 분야 최고의 전문가를 찾아 맡겨야 한다. 이 힘들고 고독한 결단만이 아직 아무도 해내지 못한 성공한 대통령의 성공한 정권을 가능케 할 것이다.

김태유 서울대 산업공학과 명예교수·리셋 코리아 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