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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남정호의 퍼스펙티브

꽉 막힌 양자 관계, 다자외교로 풀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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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새 정부에 필요한 외교 해법 

남정호의 퍼스펙티브

남정호의 퍼스펙티브

향후 5년간 이 나라를 끌어갈 지도자가 선출됐다. 문재인 정부는 탈원전 정책 등으로 많은 비판을 받지만, 외교 분야도 이 못지않다. 문 정부는 지난 4년 10개월간 오로지 북한에 올인한 탓에 미·중·일 등 주변 주요국 어느 한 나라와도 매끄러운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다. 혈맹이라는 미국과의 동맹 관계는 북한 인권문제와 중국·우크라이나 대응 방식 등으로 삐거덕거리고 있다. 중국의 경우 사드 배치 문제로 빚어진 한한령(限韓令) 등의 앙금이 말끔히 가시지 않았다. 위안부 합의 파기로 본격화된 일본과의 갈등은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이어 최근 불거진 사도광산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 논란으로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많은 전문가는 껄끄러운 미국·중국·일본 등과의 양자 관계를 다자외교의 틀에서 풀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래야 직접적인 충돌에 따른 부담을 줄이면서 우리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지도자의 탄생에 맞춰 다자외교의 맥락에서 나라별 대응 전략을 점검해 본다.

직접 충돌 따른 부담 줄이는 묘책 #동맹 강화 위해 미 인권 외교 지원 #보호주의로 변한 한한령 대응 필요 # 대일 관계,미국 도움받아 개선해야

지난 1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 인권이사회 회의에서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화상을 통해 북한 등 인권 유린 국가에 대한 제재를 역설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지난 1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 인권이사회 회의에서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화상을 통해 북한 등 인권 유린 국가에 대한 제재를 역설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미국 '가치외교' 도와야
"미국은 외교 정책에서 인권을 중심에 둔다."
지난해 3월 말 한국이 3년 연속 유엔 북한 인권결의안 공동제안국에서 빠진 데 대한 논평을 요구받자 미 국무부는 이렇게 답했다. 바이든 외교는 명확하고 일관돼 있다. 경제적 이익만을 좇던 트럼프 때와는 달리 인권 중심의 '가치외교(value diplomacy)'를 펴겠다는 거다.
이 같은 기조는 대북 정책을 포함, 모든 외교 방침에 녹아있다.  북한과의 대화를 모색하면서도 북한 내 인권 유린은 좌시하지 않겠다는 게 바이든 행정부의 확고한 입장이다. 지난 1일 토니 블링컨 국무부 장관이 유엔 인권이사회 화상회의에서 "북한 등에서 발생하는 인권 위기는 고발뿐 아니라 이를 막고 가해자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그간의 문 정부는 북한 인권 문제를 못 본 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이 당사자나 다름없는데도 최근 3년 연속 유엔 북한 인권결의안 공동제안국에서 빠졌다. 남북 교류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게 이유지만 한·미 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게 분명하다.
따라서 "한미동맹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새 정부는 유엔과 같은 다자외교 무대에서 미국의 가치외교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게 필요하다"고 다자외교 전문가인 윤여철 광주시 국제관계대사는 강조했다. 지금처럼 바이든 외교의 핵심 원칙을 외면하는 노선을 택하면 한미동맹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새 정부는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는 동시에 민주주의와 인권에 입각한 정책도 소홀히 해선 안 된다.

사드 배치를 둘러싼 한·중 간 갈등으로 2020년 11월 중국 지린성 롯데마트 앞에서 ‘사드 부지 제공 규탄’ 집회가 열렸다. [사진제공=웨이신 캡처]

사드 배치를 둘러싼 한·중 간 갈등으로 2020년 11월 중국 지린성 롯데마트 앞에서 ‘사드 부지 제공 규탄’ 집회가 열렸다. [사진제공=웨이신 캡처]

다자 틀에서 중국 견제
한·중 간 최대 현안은 2016년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에서 비롯된 한한령 해소다. 정치적 갈등이 경제로 번지면서 한국산 제품과 서비스, 그리고 문화 콘텐트의 수출 길이 제한돼 국내 기업들이 계속 큰 피해를 보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제라도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를 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올해 들어 한국 드라마 5편이 방영되는 등 한한령이 풀리는 듯한 조짐도 보이지만 완전한 해제까진 멀었다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사드에서 시작됐지만, 세계적으로 선풍을 일으킨 한국 콘텐트에 대한 두려움으로 쉽게 문을 열지 않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본다. 이 때문에 한한령이 보호주의 정책으로 변해 다자기구인 WTO에 제소해 막아야 한다는 의견도 없지 않다.
한편 미·중 간 갈등이 증폭되면서 대중 견제에 동참하라는 바이든 행정부의 압박도 거세지고 있다. 이런 요구를 들어주면서도 중국의 보복을 피하는 방법이 바로 다자 기구 또는 협력체 가입이다. 4개국 협력체(Quad·쿼드) 등에 합류한 뒤 이 기구 차원의 대중 견제에 동참하면 중국의 보복을 면할 가능성이 커진다.

일본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면서 한국과의 갈등을 빚고 있는 니가타현의 사도(佐渡) 광산의 선광장(캐낸 광석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장소). [연합뉴스]

일본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면서 한국과의 갈등을 빚고 있는 니가타현의 사도(佐渡) 광산의 선광장(캐낸 광석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장소). [연합뉴스]

한·일 갈등은 한·미·일 협력으로
과거사 갈등에서 비롯된 한·일 간 반목은 나아질 기미가 없다. 특히 강제동원 배상 문제는 일본 측에서 타협을 거부해 해결의 실마리를 못 찾는 상태다. 과거에 이런 상황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15년 박근혜 정부 당시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양국 정부가 좀처럼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이렇듯 꽉 막힌 관계를 풀어준 게 미 오바마 행정부에서 부통령을 지낸 지금의 조 바이든 대통령이었다. 나중에 그는 자신의 역할을 “부부관계를 복원시키는 이혼상담사 같았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어쨌든 한·미·일 삼각 협력의 중요성과 한·일 관계의 미묘함을 잘 아는 바이든이기에 그가 적극적으로 나서면 양국 관계가 개선될 여지가 커질 게 분명하다.
사도광산의 문화유산 지정문제 역시 일본에 철회하라고 압박만 할 게 아니라 국제무대인 유네스코에서 외교력을 발휘하는 게 보다 효과적인 대응책일 것이다.

미국 뉴욕에 자리잡은 유엔 본부 전경. [연합뉴스]

미국 뉴욕에 자리잡은 유엔 본부 전경. [연합뉴스]

절실한 다자외교 강화
이렇듯 국제무대에서 미국의 가치외교를 지원하고 중국과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다자 문제에 정통한 전문가가 필요하다. 그간의 한국 외교는 한·미, 한·중 및 한·일 간 양자 관계에 치중해 다자 외교에 소홀히 해온 게 사실이다. 하지만 기존 외교의 주 관심사던 안보 분야 외에도 기후·환경·보건 문제가 부각되면서 다자주의적 접근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현재 대부분의 국제적 현안은 유엔의 틀 안에서 논의되고 해결책이 제시된다. 사도광산의 문화유산 등재 여부도 유엔 산하 기구인 유네스코에서 결정한다.
대부분의 일이 그렇지만 특히 외교는 '사람'이 핵심이다. 얼마나 고급 인력을 키우고 이들을 국제무대에 내보내 어떻게 전문 지식을 쌓게 하느냐에 따라 외교력이 결정된다. 그런 면에서 가급적이면 많은 국내 인력이 유엔 본부와 같은 국제기구에 진출해 고위직에 오르고 전문성을 쌓도록 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래야 국제기구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전문가들을 확보할 수 있다.
과거, 특히 반기문 사무총장이 유엔을 이끌 때는 적잖은 한국인이 유엔 고위직에 진출했었다. 김원수 전 유엔 사무차장을 비롯, 유엔 사무총장 특별고문(사무차장급)으로 일한 강경화 전 외교부 장관, 유엔 코트디부아르 특별대표 (사무차장급)였던 최영진 전 유엔대사 등이 그런 케이스다.

윤여철 대사

윤여철 대사

이상화 대사

이상화 대사

장욱진 국장

장욱진 국장

하지만 지금은 유엔 고위직 진출은 고사하고 외교부 내 다자, 특히 유엔 관련 전문가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유엔 사무총장 특별보좌관이었던 윤여철 광주시 국제관계대사와 그 후임인 장욱진 국제기구국장, 그리고 보좌관으로 일하다 귀국해 북핵외교기획단장을 지낸 이상화 공공외교대사 등이 그런 인재들이다.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으로 발전하면서 기후변화·난민·환경오염 등  다자간 협상으로 접근해야 할 난제들은 갈수록 늘고 있다. 이런 터라 유엔과 같은 국제기구 전문가를 육성하고 이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게 국익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새로운 정부는 북한 비핵화, 한·일 관계 개선, 한한령 해소 등 발등에 떨어진 불 뿐만 아니라 다자외교의 중요성을 인식, 이 분야를 강화하는 전략적 사고가 절실한 때다.

유엔 분담금 순위(2021년). 그래픽= 전유진 yuki@joongang.co.kr

유엔 분담금 순위(2021년). 그래픽= 전유진 yuki@joongang.co.kr

유엔 분담금 11위 한국,인력 진출은 72위 

유엔은 200여개 회원국이 내는 분담금으로 돌아간다. 분담금은 각국의 경제력을 반영해 결정되는데 세계 10권의 한국은 이에 걸맞게 2019~2021년도 유엔 정규 예산 및 평화유지활동(PKO) 비용의 2.267%를 내 11번째 기여국이었다. 그랬던 한국의 분담률은 지난해 말 유엔 총회에서 2.574%로 올리기로 결정됐다. 이로써 한국의 분담률 순위도 11위에서 9위로 상승하게 된다.

 유엔에 대한 기여도 상승은 국제적 위상이 높아진다는 측면에서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재정적 기여에 비해 이에 따른 고용상 혜택을 한국이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명문화된 건 아니지만, 재정적 기여가 많은 나라일수록 더 많은 인력을 진출시킬 수 있다. 이럴 경우 직간접적 영향력도 커지기 마련이다.
유엔 산하 총인원은 모두 11만6000여명. 분담금 기여분에 걸맞게 한국인 직원이 유엔에 진출했다면 2600여명이 돼야 한다. 그러나 실제 한국 직원 숫자는 474명에 불과하다. 전체의 0.4%로 72위에 머무르고 있다. 한국의 국제적 위상과 재정적 기여분에 걸맞은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한국인이 유엔에서 일할 수 있고, 일해야 한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