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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루소포비아' 퍼진다…"러시아인 안 받아" 곳곳서 딱지

중앙일보

입력

지난 5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전쟁 반대 시위. 해외 거주 러시아인들에 대한 혐오 정서가 확산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지난 5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전쟁 반대 시위. 해외 거주 러시아인들에 대한 혐오 정서가 확산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러시아 전통음식점을 운영하는 아이크 게이자리얀은 지난달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하루 평균 15~20건의 욕설 전화를 받고 있다. 아르메니아계 러시아인인 그에게 대부분은 "러시아인은 살인자" "당신은 푸틴의 러시아인" 등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예약했다가 아무 말 없이 취소하는 '노쇼(No-Show)' 단체예약 손님들도 늘었다.

10일(현지시간) 미 시사주간지 타임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전 세계 러시아인을 대상으로 확산하고 있는 '루소포비아(러시아 혐오·Russophobia)'를 조명했다. 게이자리얀은 "처음엔 애들 장난인 줄 알았는데 점점 수위가 높아지더니 쌍욕까지 들어야 했다"며 "전쟁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저질렀는데, 마치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처럼 공격당했다"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러시아인에 대한 증오는 범죄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 6일 영국 런던의 우크라이나 침공 규탄 시위 현장. [EPA=연합뉴스]

러시아인에 대한 증오는 범죄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 6일 영국 런던의 우크라이나 침공 규탄 시위 현장. [EPA=연합뉴스]

러시아어만 들리면 쏘아본다…증오범죄 표적된 러시아인들 

타임에 따르면 서방을 중심으로 러시아인 혹은 러시아와 관련됐다고 간주되는 모든 것을 대상으로 분노가 무차별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유럽에서 러시아인들은 길 가다가 "테러리스트"라며 모욕을 듣거나 어린아이들도 학교에서 또래집단으로부터 배척당하고 있다. 영국 런던에 사는 딜리아라는 파이낸셜타임스(FT)에 "자녀와 버스에서 러시아어로 대화할 때 적대적인 시선을 받은 적 있다"고 말했다. 체코의 일부 식당과 상점에는 러시아어로 "러시아인과 벨라루스인들을 받지 않겠다"는 팻말까지 내걸렸다.

러시아인에 대한 증오는 기물 파손 등 범죄로 이어지고 있다. 미 워싱턴DC의 한 러시아 음식점은 협박 전화를 넘어서 정체불명 괴한의 습격으로 문과 창문이 파손당했다. 캐나다에서는 러시아 정교회 건물 일부가 붉은색 페인트로 테러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밴쿠버에 있는 러시아 주민센터는 우크라이나 국기 색인 파란색과 노란색 페인트로 뒤덮였다.

서구 정치권 일각에선 이같은 러시아인 혐오 정서에 편승해 "모든 러시아 유학생을 미국에서 쫓아내자"(미 에릭 스왈웰 의원) "모든 러시아인을 집으로 돌려보내자"(영 로저 게일 의원) 등의 차별 발언까지 나오고 있다고 타임은 전했다. 혐러 감정 탓에 러시아 국적임을 숨기는 재외 러시아인까지 생겼다고 워싱턴포스트(WP)는 보도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대한 혐오가 러시아인에까지 확산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대한 혐오가 러시아인에까지 확산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최근 한국에서도 반(反)러 감정 표출이 가시화하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117만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버 '소련여자'에게 러시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악플이 쏟아졌다. 지난달 28일에는 부산에 있는 러시아연방 총영사관에 '전쟁 반대'를 이유로 한 남성이 난입을 시도한 사건이 발생했다.

'캔슬 컬처' 러시아와 관련된 모든 걸 부정한다

루소포비아는 애초에 18~19세기 나폴레옹 시절 러시아에 대한 공포감에서 비롯됐다. 이후 20세기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서방 세계에는 반공주의 영향으로 소련인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이 퍼졌다. 소련 해체 이후 잠잠하던 루소포비아는 지난달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폭발했다. 지난달 말, 미 ABC뉴스와 WP가 공동으로 집계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가운데 80%는 '러시아는 미국의 적'이라고 응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구소련 시절이던 1983년 이후 가장 높은 수치다.

루소포비아는 러시아의 모든 것에 대한 '보이콧'으로 확대되는 중이다. 특히 러시아 문화예술은 주요국 '블랙리스트'에 올라있다. 영국 극장들은 올해 예정됐던 러시아 시베리아 국립발레단이나 로열 모스크바 발레단, 볼쇼이 발레단의 공연을 일괄 취소했다. 스페인과 아일랜드에서도 러시아 발레단 투어가 취소됐다. 오랜동안 러시아와 교류·협력해온 프랑스 파리 국립 오페라극장 역시 러시아 당국과 관련된 예술가 및 예술단체와의 협업을 중단한다는 성명을 지난 1일 발표했다.

러시아인에 대한 '캔슬 컬처(Cancel culture)'가 또다른 인종차별 행위로 이어진다는 우려도 나온다. 캔슬 컬처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과 집단을 외면하거나 아예 배척하는 행동 양식을 의미한다. 알렉산드라 르위키 영국 서섹스대 사회학자는 WP에 "모든 러시아인을 한 데 묶어 전쟁과 무관한 사람들을 이유 없이 사회에서 밀어내고 있다"며 "각계각층의 러시아인들이 인종차별적 증오 범죄의 표적이 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미 조지메이슨대 타일러 코웬 경제학 교수는 블룸버그 통신에 "작금의 '캔슬 컬처'는 새로운 매카시즘(반공주의)"이라며 "러시아 공연단을 보이콧하는 게 우크라이나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라며 비판했다.

지난 5일 영국 런던 트리팔가 광장에서 한 여성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규탄하는 시위에 참가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 5일 영국 런던 트리팔가 광장에서 한 여성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규탄하는 시위에 참가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한편 10일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페이스북·인스타그램의 모회사인 메타는 일부 국가에서 러시아인에 대한 폭력·증오를 조장하는 콘텐트를 일시적으로 허용한다는 내용의 내부 문서를 작성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증오·폭력선동 표현 등의 게시글을 올리면 자동 시스템으로 즉시 삭제하던 기존 검열 정책의 변경을 의미한다고 로이터는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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