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김경록의 은퇴와 투자

고령화와 부의 불균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7면

김경록 미래에셋자산운용 고문

김경록 미래에셋자산운용 고문

발자크가 쓴 소설 『고리오 영감』에서 고리오는 자수성가해서 번 돈을 모두 두 딸에게 지참금으로 주는데 지참금에서 나오는 소득이 당시 평균 소득의 50배 정도였다. 19세기의 유럽은 부의 세습 시대였다. 당시 소설에 상속 이야기가 약방의 감초처럼 나오는 이유다. 이후 산업혁명과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으로 부의 세습 문제는 크게 줄었다. 하지만, 이후의 오랜 평화시대, 고성장, 그리고 인구구조 변화로 부의 세습 문제가 다시 대두되고 있다.

인구구조 변화가 부의 세습에 영향을 준다는 게 생뚱맞을 수 있지만 실제로 고령화는 부(富)의 불균형을 가져올 수 있다. 젊은 세대에 비해 고령 세대의 인구가 상대적으로 많아지는 과정에서 부의 세습을 통해 부의 불균형이 초래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토마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에서 언급한 바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경제성장과 함께한 베이비부머
자녀에게 축적한 재산 물려줘
부의 불균형도 세습되는 사회
인구변화 따른 상속문제 대두

은퇴와 투자

은퇴와 투자

우리나라는 1960년대 전후로 자녀를 4명 정도 낳았고 이들이 베이비부머를 형성했다. 베이비부머는 자녀를 2명 낳았고 베이비부머의 자녀들은 1명을 낳고 있다. 한편, 경제는 1960년대부터 고성장을 구가했고 특히 2000년대 이후 소득은 1만 달러에서 3만 달러를 훌쩍 넘을 정도로 급성장했다. 이에 따라 부동산, 주식 등의 자산가격도 크게 올랐다. 하지만 이제는 일자리가 부족하고 저성장 시기에 접어들었다.

80대가 넘은 베이비부머의 부모들은 한국전쟁으로 재산이 파괴됐고 경제 성장기에 얻은 소득으로는 자녀 교육에 투자해야 했다. 게다가 수명이 예상 외로 길어지면서 사망 시 자산도 적다. 인구 숫자도 많지 않을뿐더러 모아 둔 재산도 많지 않은 셈이다. 반면에 이들의 자녀들인 베이비부머는 부모보다 더 잘 살고 숫자도 많다 보니 자녀 한 명이 받는 상속액은 적어 부의 세습이 베이비부머의 소득이나 자산 형성에 미치는 영향은 적다.

하지만 베이비부머와 그들 자녀 관계는 다르다. 베이비부머들은 고성장 과정에서 부를 축적했다. 부동산을 비롯한 자산가격이 특히 많이 올랐다. 덧붙여, 이들은 인구 숫자가 많은 반면에 자녀 수는 2명이 되지 않아 자녀가 받는 상속액이 많아지게 된다. 부가 많은 베이비부머는 그만큼 자녀에게 세습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상속재산을 많이 받는 베이비부머 자녀와 그렇지 않은 자녀 간에 부의 편중이 일어난다.

베이비부머가 그랬듯이 그들의 자녀 역시 상속이 아닌 좋은 일자리를 통해 부를 증진할 수 있지 않은가? 유감스럽게도 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일자리가 부족하고 저성장이 지속하는 시기다. 그래서 부모 세대보다 못 사는 세대가 될 수 있다는 말들을 한다. 좋은 근로소득을 얻을 기회가 줄어드는 상황에서는 상속받는 재산의 중요성이 커질 수밖에 없다. 베이비부머 세대의 부의 불균형이 자녀 세대로 이전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반론도 있다. 고령화로 인해 사망률이 낮아져 오래 사니 상속액도 줄어들 수 있다. 수명이 길어진 만큼 생활비 지출이 증가하여 자산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보통의 가계는 그럴지 몰라도 많은 부를 가진 가계는 생활비 지출이 많아지는 게 부의 규모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오래 사는 기간 동안 높은 자본 수익률로 재산은 늘어나게 된다. 좀 더 늦은 나이에 상속을 받지만 더 많은 금액을 상속받을 수 있다. 그리고 증여를 통해 사전에 재산을 이전하는 경우도 많다. 오늘날 증여에 의한 자산의 이전은 상속에 따른 이전만큼이나 중요하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현재 고령인구(65세 이상) 1명당 생산가능인구(15~64세)가 4.5명이지만 2040년이면 1.7명이 될 정도로 고령자 대비 젊은 인구 비중이 급감한다. 감소 속도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다. 이에 따라, 베이비부머가 많이 사망할 시기인 2050년 전후까지 증여와 상속이 활발하게 일어날 것이며 부의 세습 문제도 대두할 전망이다. 『고리오 영감』에서 보듯이 상속이 소득보다 우세한 시기가 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과세 표준 30억원 이상의 상속세율이 50%일 정도로 상속·증여세율이 높아 세후(稅後) 기준의 부의 세습 문제는 완화될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편법이나 저항도 거세질 수밖에 없다. 인구구조 변화에 따른 세대 간 문제는 상속과 증여에도 내재해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김경록 미래에셋자산운용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