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대입 논술 사교육, 사교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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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대입 논술을 위한 사교육 광풍이 불고 있다. 유아논술반이 생기고 초등학생들에게 니체를 읽힌다고 한다. 전국적으로 논술학원의 수가 2년 새 두 배 가까이 늘어났고, 전국 일반 고교의 30% 정도가 논술학원 강사를 불러들여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한다.

안병영 전 교육부총리는 요즈음의 사태를 보면서 공교육을 망가뜨린 역사의 죄인이 될까 봐 잠이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입시에서 논술을 도입한 중요한 이유는 암기 위주의 교육에서 벗어나 학생들이 좋은 책을 많이 읽고, 좀 더 깊이 있고 폭넓은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주기 위한 것이었다. 대입 논술을 사교육 시장이 아닌 공교육체제로 흡수하기 위해 크게 '고교와 대학 간의 협의기구'와 '대학입학사정관제'를 두기로 했다. 그러나 대입제도를 발표한 직후 안 부총리는 물러났고, 이러한 장치들도 함께 날아가 버렸다. 새로 부임한 교육부총리는 두 장치를 가동조차 하지 않았고, 일선 학교나 교사들은 논술시험을 학교에서 가르칠 수 없다고 손을 놓아 버렸다. 불안한 학생들은 '아무 염려하지 말고 우리한테 오라'는 달콤한 학원의 유혹에 이끌려 너도나도 학원으로 몰려갔다. 처음 의도와는 달리 대입 논술이 공교육을 죽이고, 사교육을 부추기는 꼴이 되고 말았다.

뒤늦게나마 대학과 교육인적자원부가 논술을 공교육체제로 끌어오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앞으로 다음과 같은 노력을 더욱 지속적으로 기울여야 한다. 먼저 대학들 가운데서도 입시 경쟁이 치열한 소위 일류 대학들이 앞장서 공교육을 살릴 수 있는 방향에서 고등학교 교사와 머리를 맞대고 대입 논술의 방향.문제.유형 등을 긴밀히 협의해야 한다. 또한 교육청 담당자와 교사들을 연수시켜야 한다. 대학입시는 대학의 자율권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예시문제만 툭 던져놓고 '우리 학교에 들어오려면 무조건 이렇게 공부해라'고 일방적으로 요구만 하지 말고, 대학도 공교육을 살리기 위한 사회적 책무를 다해야 한다.

일선 학교나 교사들도 학생들을 학원으로 내몰거나 학원 강사들을 학교로 불러올 생각만 하지 말고, 학교에서 논술을 가르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서울 동북고는 수학.과학.윤리.경제 등 서로 다른 교과 선생님들이 힘을 합해 논술을 지도하고 있다.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 학교의 윤석철(수학) 교사는 "사교육이 아니면 통합논술이 안 된다는 얘기는 진실이 아니며, 공교육에서도 얼마든지 논술을 잘 가르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있다. 전주 상산고에서도 오래전부터 좋은 책을 선정해 학생과 교사가 함께 읽고, 토론하고, 글쓰기 지도를 해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교육부는 논술 문제의 수준을 낮추라거나, 논술 가이드라인을 정해 이런 문제는 괜찮고 저런 문제는 안 된다며 시시콜콜 간섭만 하지 말고, 대학들이 고등학교와 긴밀한 협력체제를 구축해 나가도록 독려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해 줘야 한다. 대한민국의 수백 개 대학을 한 가지 척도로 묶어 획일화하지 말고, 대학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논술이 행해질 수 있도록 오히려 장려해야 한다.

교육청도 일선 학교들이 평소 폭넓고 깊이 있는 사고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교사 연수는 물론 논술교재와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해 일선 학교에 보급해야 한다. 서울시교육청에서는 현 교육감 취임 이후 '학력 신장'을 최우선 과제로 선정해 학생들에게 깊이 있는 사고능력을 길러 주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논술을 공교육체제로 흡수하기 위해 우리 모두가 힘을 합해 열심히 노력하면 사교육을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와 같은 지식정보사회에서 반드시 필요한 다양하고 폭넓은 사고 능력을 길러 줄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입시제도와 논술교육이 학교 현장에 제대로 뿌리내릴 수 있도록 모두 함께 노력하자.

정진곤 한양대 사회교육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