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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 우려한 첸푸, 미 특사단에 공항 후문 이용 권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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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8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18〉

미·중 수교 1년 후 양국은 군사교류와 합작을 시작했다. 1980년 봄, 샌디에이고의 미군함대 레이더 시설을 참관하는 중국 부총리 겸 국방부장 겅뺘오(耿飇).

미·중 수교 1년 후 양국은 군사교류와 합작을 시작했다. 1980년 봄, 샌디에이고의 미군함대 레이더 시설을 참관하는 중국 부총리 겸 국방부장 겅뺘오(耿飇).

1978년 12월 16일, 미 39대 대통령 지미 카터는 의회 휴회 기간에 중화인민공화국 승인을 발표했다. 상·하 양원은 물론, 민주당·공화당 할 것 없이 비난이 잇달았다. 베이징 주재 미국연락처 주임과 중앙정보국(CIA) 국장을 역임한 부시가 첫 방을 날렸다.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했다. “베이징과의 교역은 얻을 것이 없다. 막대한 지출을 감수해야 한다. 미국은 중국이 제안한 조건을 수락하고 우리에게 충실했던 대만을 버렸다. 우리 역사상 처음인 평화로운 시기에 맹방(盟邦)과의 조약을 파기했다. 아무런 이유와 이익도 없는 불가사의한 일이다.”

중공 승인한 카터, 국내서 뭇매 맞아

타이베이 도착 후 성명을 발표하는 크리스토퍼. 가장 왼쪽이 첸푸. [사진 김명호]

타이베이 도착 후 성명을 발표하는 크리스토퍼. 가장 왼쪽이 첸푸. [사진 김명호]

카터는 정식 단교를 앞둔 대만(중화민국)에 국무차관 크리스토퍼가 인솔하는 대표단 20명을 파견했다. 12월 23일, 대만 출발을 앞두고 크리스토퍼가 중화민국 대사관을 방문했다. 대사 선젠홍(沈劍虹·심검홍)에게 타이베이에 가는 이유를 설명했다. “특사 자격으로 대표단과 함께 대만에 간다. 관계유지를 위한 토의가 주목적이다. 2개월 후 쌍방이 비관방(非官方) 기구를 설립해 대사관 업무를 접수하면 된다. 세부적인 토론은 나눌 단계가 아니다.”

태평양지구 미군 사령관과 국무부 법률담당 헐버트 한셀 외에 상무부와 국방부의 고위직이 포함된 미국대표단의 면면은 화려했다. 대만 측도 만만치 않았다. 외교부와 국방부, 경제부, 교통부, 신문국의 정예들이 만반의 준비를 했다. 장징궈(蔣經國·장경국)가 담판 대표로 지목한 외교부 차장 첸푸(錢復·전복)의 회고에 이런 내용이 있다. “크리스토퍼가 백악관에서 받은 훈령은 단순했다. 단교 이후 양국관계를 어떻게 안배하느냐가 다였다. 비관방 기관은 민간단체를 의미했다. 민간단체는 정부를 대표할 수 없었다. 우리 측에서 받아들이기엔 무리였다.”

대만 외교부장 장옌스(蔣彦士·장언사)는 남의 의견을 경청하는 장점이 있었다. 미국특사 일행이 도착하기 전 학자와 전문가들을 초청해 좌담회를 열었다. 비분강개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여성 참석자들이 특히 심했다. “미국이 우리를 홀대했다. 우리 민중의 기세가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줄 필요가 있다. 대표단이 머무르는 동안 대규모 반미 시위를 계속해 미국이 우리 의견을 받아들이게 하자.” 장은 말 같지 않은 소리에 당황했다. 첸푸를 힐끗 쳐다봤다. 첸이 입을 열었다. “외교는 담판이다. 전문가들의 영역이다. 군중을 끌어들이는 것은 금물이다. 소란만 일어나고 될 일도 안 된다. 군중은 통제하기 힘들다. 들뜨게 하기는 쉬워도 진정시키기는 어렵다. 담판 석상에서 민의(民意)를 미국 측에 전달하겠다.” 첸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한마디 하자 여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맥없이 주저앉았다. 혈기 왕성한 당원들은 달랐다. 이를 악물고 씩씩거렸다.

미·중 수교 발표 후 대만의 중화민국 정부는 3일간 휴교령을 내렸다. 1978년 12월 17일, 대만대학 정문 앞. [사진 김명호]

미·중 수교 발표 후 대만의 중화민국 정부는 3일간 휴교령을 내렸다. 1978년 12월 17일, 대만대학 정문 앞. [사진 김명호]

12월 27일 밤 10시, 크리스토퍼 일행이 타이베이에 도착했다. 당일 오후 신문국장이 첸푸에게 영문과 중문으로 작성한 성명서를 전달했다. “총통이 오늘 밤 공항에서 사용하라고 했다.” 초안 작성자를 물었다. “당 원로들이 머리를 맞대고 만들었다”는 말에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읽어보니 엄숙하기 그지없는, 중국 고문(古文)이 아니면 표현이 불가능한 선전포고문 같았다. 장징궈에게 달려가 양해를 구했다.

특사 영접을 위해 공항으로 향하던 첸푸는 깜짝 놀랐다. 거리 양편에 군중과 학생들이 가득했다. 질서정연하고 차량 소통도 원활했다. 첸의 차를 향해 박수 보내며 파이팅을 연발했다. 첸은 불안했다. 질서가 정연한 것이 수상하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공항에 도착하자 미국대사 운저에게 다가갔다. “밖에 사람들이 많다. 위험하다. 만에 하나,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공항을 떠날 때 후문을 이용하자.” 운저는 화를 버럭 냈다. “특사 명단에 내 이름도 있다. 우리는 정정당당한 미국 대통령의 특사다. 뒷문으로 나갈 수 없다.” 첸은 답답했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다 보니 두리번거리며 공사 브라운을 찾았다. 브라운이 첸을 안심시켰다. “대사관은 정보기관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 지 오래다. 소요 가능성이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미국·대만 대표단 일행 어색한 만남

특사 일행은 구면이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눌 사이였지만, 이날은 환영한다는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오는 동안 “별일 없었느냐”가 고작이었다. 어색한 악수 하고 기자실로 향했다. 첸푸가 크리스토퍼의 의견을 구하고 성명서를 펴들었다. “지금 미국 특사 일행을 대하는 심정은 슬픔과 유감을 감당하기 힘들다. 중화민국은 독립된 주권국가다. 다년간 서태평양의 안전과 평화에 기여했다. 중화민국 총통 장징궈 선생은 중·미 양국이 연합하면 공동의 이익을 누리고, 갈라서면 양국의 피해가 막심하다고 했다. 불행하게도 미국 정부는 12월 15일 중공이 제시한 조건을 수락했다. 양국의 전통적인 우의와 화목을 파괴하고, 아태(亞太)지역의 평화와 안전에 엄중한 손해를 끼쳤다. 카터 대통령은 인권이 미국 외교정책의 영혼임을 누차 강조했다. 무고한 살상을 남발하고, 인권을 무시하고, 인민의 자유를 박탈하는 중공과의 외교관계 수립은 한편의 코미디다. 중공은 허무맹랑한 구호로 세인의 눈과 귀를 어지럽히며 폭력혁명과 무력을 통한 대만해방을 포기하지 않았다.”

첸푸는 미국과 중공의 군사동맹 체결 가능성도 우려했다. “미국은 1년 후 중·미 공동방위조약 종지(終止)를 결정했다. 아태지역의 안정과 평화를 위한 구체적이고 합리적인 대안을 촉구한다. 미국대표단은 우리의 희망을 미국 정부에 충실히 전달하기 바란다.”

크리스토퍼의 성명은 간단했다. 장차 대만과의 관계에 비정식(非正式)이란 용어는 쓰지 않았다. 비관방만 강조했다. 묘한 여지를 남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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